2024/04 16

교수님들이 일어났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4월 19일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서는 큰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6일 후 1960년 4월 25일 전국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면서 탄압에 멈추었던 시위가 다시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 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오후 5시 45분 교문을 나와 종로, 을지로 ..

1993년 소말리아파견 상록수부대 발대식

1993년 4월 23일 소말리아에 파병되는 상록수부대의 발대식이 열렸다. 흔히 상록수부대 하면 1999년 동티모르 파병을 이야기하지만, 1993년 7월부터 1994년 3월 15일까지 소말리아에 파견된 것이 한국군 최초의 유엔평화유지군(PKO)이었다. 제2차 유엔 소말리아 임무(UNSOM II)에 건설공병대대 252명(공병 190명, 장교 30명, 부사관 32명)이 파병하였다. 정식 명칭은 제189건설공병대대이다. 이들은 소말리아 평화유지활동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주로 내전으로 파괴된 도로 보수공사와 주민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상록수부대는 제3차 유엔 앙골라 검증 임무(UNAVEM III)에 건설공병대대 198명(장교 22명, 부사관 16명, 공병 160명)이 1995년 10월부터 파병되어 1996년 12..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아전 출신인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1897년 11월 25일 태어났다. 본명은 주기복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고 주기철로 개명하였다. 호는 소양(蘇羊)으로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이다. 웅천 개통학교와 평북 정주군의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 연행되었던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로 나섰다. ‘한민족이 새롭게 거듭나야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경을 완수..

곡우사리 조기를 가장 으뜸

4월 20일은 곡우(穀雨)이다. 곡식에 비가 내린다는 의미의 곡우는 옛날에는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날부터 못자리를 비롯한 논과 밭에 씨를 뿌려 한 해 농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못자리나 씨를 뿌릴 때 물은 꼭 필요하므로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농업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파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중요한 일을 앞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정한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 즉 동물을 잡는 행위, 사냥, 다툼, 금주, 부부관계 등을 삼가했다. 곡우 때처럼 좋은 시기도 없을 듯 하다. 나무에는 물이 한참 오르는 시기이기에 쇠나무의 고로쇠물도 이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곡우무렵에 따는 차잎 또한 최고라고 한다. 곡우에 자연의 기를 많이 받아 한 해를 건강하게 살도록 해..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데 조병옥이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미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4번째 대통령의 당선을 노리는 이승만의 대통령 경쟁자가 없어졌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연로한 이승만이 유고시 대통령을 대행할 부통령을 자유당 인물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궐기하였다. 4월 19일에는 서울 시내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규모의 시위를 계속하였고,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승..

시인 이상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그의 글은 때로는 암호처럼 보일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데, 특히 그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버지 김연창이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태어난 이상은 세 살 때인 1912년 몰락한 양반인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자식을 낳지 못한 큰어머니의 구박을 받았으며, 아들가지 태어나면서 홀대가 심해졌다. 큰아버지는 이상을 집안을 일으킬 인재로 생각해 엄격하게 양육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였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며, '이상'이라는 필명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부르는 것..

‘화성 제암리 학살 만행의 날’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에 장날을 맞아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 연설회를 한 다음 만세시위를 하였다. 시위대는 일본인 소학교도 불질렀다. 다음 날인 4월 1일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자 일본인 부녀자와 언론인이 피난할 정도였다. 만세시위가 계속 이어지자 일본군은 검거반을 조직해 탄압에 나섰다.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오늘날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본군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11명의 군인과 2명의 경찰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강연을 한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를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이자 중위는 군사들에게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김동삼 선생은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일제 경찰에 하얼빈에서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1937년 4월 13일 순국하였다. 선생은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일제의 감시에 혹시나 처벌받을까 두려워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않을 때, 한달음에 달려간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고 화장을 해 한강에 뿌렸다고 한다. 김동삼 선생은 일생을 분열된 독립운동의 통합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의 이름인 동삼(東三)에는 ..

동의수세보원

130년 전 오늘(1894년 4월 13일)은 사상의학을 완성한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가 총 4권 2책의 저술을 끝마친 날이다. 은 이제마가 1893년 7월 13일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주창한 책이다. 책 이름에서 ‘동의(東醫)’는 중국의 의가(醫家)와 구별하기 위한 조선 고유의 의술을 나타내며, ‘수세(壽世)’는 온 세상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킴을 뜻한다. 이제마는 은 병이 생기고 난 뒤 어떻게 치료하고 약을 쓰면 나을 수 있다는 치료 중심의 의서인데 비하여, 은 애초에 병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하면 되는가 그 방도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하였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사람이 타고난 장부(臟腑)마다 독특한 성리(性理)가 있으며 그 기능이 강..

비틀스

1970년 4월 10일, 비틀스가 해체되었다. 비틀즈의 시초는 1957년 존 레논이 조직한 고등학교 밴드 '쿼리멘'이다. 이후 몇 번의 밴드 멤버를 바꾸다가 폴 매카트니와 그의 친구 조지 해리슨이 비틀스에 가입했다. 1962년 링고 스타가 들어오면서 최종적으로 밴드가 완성됐다. 비틀스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밴드로서 인정받았다. 스키플과 비트, 1950년대 로큰 롤을 뿌리로 두며, 클래시컬한 음악과 전통 팝의 요소들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녹아냈다. 처음 그룹 이름은 비탈스, 실버 비트, 실버 비틀, 실버 비틀스로 했다가 비틀스가 되었다. 비틀스는 1960년대 초반 함부르크의 클럽을 전전하며 실력을 쌓은 이후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Love Me Do'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