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66

송학선 의사

송학선 의사는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송성근과 부인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 1학년 때인 13세에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7살 이후부터 다시 가족과 살면서 인쇄소와 농구회사에 취직하여 가족과 같이 살았으나, 직장에서의 차별대우로 반일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송학선 의사는 어릴적 하얼빈 의거를 행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면서 조선 총독 암살 의거로 반일의식을 나타내고 국민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1926년 3월에 경성사진관에 미장일을 하기 위해 찾았다가 부엌에 떨어진 양식 칼을 발견하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사이토 일본총독을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

매헌윤봉길의사

4월 27일부터 4월 30일까지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2주년 행사단과 함께 중국 상하이를 갔다.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특히 시게미쓰 공사는 1945년 미국  미주리함에서 외무장관으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이다.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중국 100만..

마라톤 영웅 아베베가 6.25 전쟁 참여

에티오피아의 세계적 마라톤 선수인 아베베는 로마 올림픽과 도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12분 11초 2의 놀라운 신기록으로 올림픽 2연패를 이룬 위대한 마라토너이다. 특히 맨발로 달려 우승하였기에 '맨발의 왕자'로 불렸다. 대기록의 사나이 아베베가 6.25 전쟁에 에티오피아 군인의 한 사람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참전을 결정한 사람은 셀라시에 황제이다. 그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아프리카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흑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것을 반대해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탈리아 침략에 패하여 망명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립을 되찾아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되었으며,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의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선발한 병사로 대대를 편성해, '가그뉴..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외국인2

위서방(웨이쉬팡)은 1923년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인 중국 안둥(安東)성 안둥(安東)시에서 태어났다. 신의주에서 살다가 1945년 안동성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부군 대위로 근무했다.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나자 신의주로 돌아와 평양 인근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했다. 화교 청년들과 함께 한중반공애국단을 조직해 1950년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을 도왔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해 허가를 받자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하자 위서방과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 단원 30명도 함께 한국으로 남하해 화교단원을 중국수색대로 다시 편성..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잠든 외국인

6·25사변은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우리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인명을 살상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은 중국인에게도 동족상잔의 아픔을 전해준 전쟁이었다. 6.25사변이 발발했을 때 장제스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면서 화교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비공식적 지원을 하였다. 유엔의 지원으로 통일이 되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군대가 '미(美) 제국주의의 확산을 막고 혈맹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아픔을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지켜내고자 젊음을 바친 분들을 소개하며 감사와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강혜림 의사는 192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산동성 서하현에서 태..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 손원일 제독

손원일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원일은 아버지 손정도가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는 가르침대로 조국의 미래는 바다라고 생각하고 일제 치하에서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원일은 영국에서 상선의 선원이 되어 5대양을 누비며 항해술을 익혔다. 이때 부친 손정도가 일제의 고문과 과로로 49세로 순국했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많이 슬퍼했다고 전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한 손원일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에 힘썼다. 가산을 털어 '해사대'라는 이름의 조직으로 80여 명의 젊은이를..

독립운동가 황기환

드라마 ‘유진 초이’ 역의 실제 인물인 황기환 지사의 유해가 지난 10일 국내로 봉환되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김태리(고애신 역)가 한 마지막 대사 "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봅시다"(See you again)"가 황기환 지사의 순국 100년만에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1886년 4월 4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황기환 지사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서 활동했다. 191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지원병으로 입대해 소대장으로 중상자 구호에 힘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 김규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을 맡아 를 제출해 유럽 내 각 언론기관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 및 저명..

민족 시인 정지용

정지용 시인은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중국 등지에서 한의학을 배워 한때는 부유했으나, 홍수의 피해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처가 친척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지용은 아버지의 방랑과 실패, 가난으로 인한 불행, 그리고 4대 독자로서 느꼈을 고독으로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 고 회고한 바 있다. 고독과 가난은 정지용을 문학적 상상력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4대 독자인 정지용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감은 불행한 환경의 정지용에게 꿈과 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지용은 17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동인지 『요람(搖籃)』을 만들어 습작을 시작하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정..

세한도를 우리에게 전한 손재형선생님

조선 후기 서예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청나라까지 알려진 김정희,김정희는 중국에서 맥이 끊긴 서법을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고유의 서체를 완성하였다.1840년, 김정희의 나이 쉰다섯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다.이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경주 김씨인 김정희 일가가 피해를 보았다.김정희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어 9년을 보냈다.제주도 유배를 갔다고 하는 것은 김정희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그러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청나라를 드나들면서 서책을 가져와제주도에 있는 김정희에게 보냈기에 김정희의 유배지 생활은 외롭지는 않았다.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그림으로 나타냈으니, 바로 〈세한도(歲寒圖)〉이다.이상적은 〈세한도(歲寒圖)〉를 헌종 ..

한국인 최초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 선수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인은 '손기정은 한국인임'을 알게될 테니까요" 라고 회고하여 손기정 선수의 애국심에 바탕한 정신력을 엿볼 수 있었다. 시상식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침울한 표정으로 치욕의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올림픽 대표선수를 뽑을 때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를 차지한 남승룡 선수와 함께 한국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