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250

통도사 대명광전

6.25 전쟁이 일어난 지도 벌써 74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 흔적은 계속 남아있다.양산 통도사 대명광전은 6.25 전쟁 중에 병원으로 이용되었다.대광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으로 되어 있다. 보물 1827호인 대광명전은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나, 영조 32년(1756) 10월 21일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2년 뒤인 영조 34년(1758) 1월 7일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준공하였다. 이곳 대광명전 벽에는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는 가련다”,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통도사와 이별한다” “정전(停戰)이 웬 말?” 등 전우들과 헤어지는 아쉬움과 통도사를 떠나는 안타까움, 그리고 6.25전쟁이 남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나라를 구하라는 서산대사의 글을 받고 승병을 모아 서산대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승병들을 이끌고 명나라 군사를 도와 평양성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서울 근교에서도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그가 거느린 의승군(義僧軍) 정예부대 1000여 명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근거지인 울산의 서생포(西生浦)를 포위하고, 수 차례에 걸쳐 적진을 드나들며 적정(敵情)을 탐지하고 평화회담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때 그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사명대사를 위협할 양으로 무기를 든 군사를 주위에 도열시켰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전혀 개의치 않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자 가토 기요마사는 거만한 태도로 ..

주문진 아들바위

강릉시 북쪽의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언덕 끝자락의 주문진의 하얀 등대 너머 위치한 소돌아들바위공원에서는 바람과 파도에 깎인 절묘하고 기괴한 모습의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도로 쪽에서 보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 하며, 코끼리 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아들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쥐라기시대에 바닷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들바위 홈페이지 참고)

여의주

용의 턱 아래에 있다고 하는 영묘한 구슬이다. 사람이 이것을 얻으면 변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졌을 때 ‘여의주를 얻은 듯이’라는 속담으로 표현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 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질을 불성(佛性)이라 했으며, 이 불성을 ‘여의주’로 표현하고 있다. 여의주와 관련된 절이 있다. 바로 용주사(龍珠寺)이다.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만들어진 갈양사인데,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절이 없어졌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은 것이다.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광무 9년(1905) 인제의 백담사에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한용운은 출가 전에 혼인을 하여 아들 한보국이 있었다. 한보국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월북하였다. 1931년 한용운은 서여연화(徐如蓮花)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었다. 남편이 선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과 서여연화의 만남은 남편을 위한 법회날이었다. 돈이 많았기에 전국 각지의 범패까지 동원한 대규모 법회에서 서여연화는 다른 스님과 달리 차갑게 자신을 대하는 한용운에게 마음이 동했다. 한용운도 하얀 소복을 입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인 서여연화에 관심이 있었다. 이때 한용운은 첫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기에 마음껏 한 여인을 좋아할 수 있었다. ..

연산군 유배지 강화도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한양도성에서 가까우면서도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바다가 좁아 조류가 급하기에 접근이 어려운 섬이었다. 2014년 길이 2.11 km의 교동대교가 안공되면서 연륙도가 되어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는 섬이 되었다. 단 민간인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 주민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교부받고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에 그 출입증을 보여주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고 야간(오후 8시~오전 6시)에는 통행할 수 없다. 지금은 편리한 곳인 교동도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연산군을 비롯한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조류가 급한 강화해협의 지리적 조건으로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렵고(오죽하면 물을 두려워한 몽골이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천도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로 피난갔..

석촌동3호분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조성된 백제시대 고분군으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왕족의 공동묘지로 대형 돌무지무덤이 7기, 널무덤, 독무덤 등이 30여 기 이상 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있다는 것은 온조왕을 비롯한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무덤은 석촌동에서 제일 규모가 큰 3호분이다.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 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모양이 점점 층이 올라갈수록 좁아져 3층으로 쌓인 기단형식의 돌무덤이다. 3층으로 된 3호분의 기법은 집안현에 있는 장군총과 비슷한 무덤이다. 장군총과 더불어 한국의 ..

덕숭산 수덕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다.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일주문은 대웅전의 건축양식에 따라 배흘림 양식에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었다. 현판은 우리나라에 '서예'라는 이름을 처음 쓴 소전 손재형 선생 작품이다. 손재형 선생은 한달 간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인 후지쓰카 치카시를 설득해 우리나라에 가져온 김정희의 '세한도'를 지켜낸 분이다.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정확한 건축 연대를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자리인 독립기념관의 추모의 자리, 독립기념관 전시실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추모의 자리로 오르는 계단은 105계단이다. 105계단은 일제의 애국지사 탄압 사건인 105인 사건을 상징한다. 105인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 선생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다가 충돌이 있었던 놈이 일경에 밀고하였다. 일경은 이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자금모금으로 날조하여 105명을 기소했는데, 이때 안명근 선생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105층계를 오르며 순국선열의 살신구국정신에 감사를 드린다. 추모의 자리 중앙에는 태극홈이 있고, 형태는 전통적인 한옥의 지붕선이다. 태극홈에서는 물이 흐르는데 순국선열들의 한많은 울분과 맑은 민족정신, 그리고 민족의 근원을 ..

개천절

어제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나라에서 공식 지정한 국경일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이 땅에 나라를 새로 연 날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는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새로 연 날은 음력 10월 3일이다. 하지만 1949년부터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 어렵다고 하여 양력 10월 3일로 정해놓고 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의 규모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왕이 직접 개천절 행사에 참가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나, 오늘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이나 태백산의 천제단은 대종교나 지역 행사에 그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개천절 행사를 하는 제단은 대개 위는 둥글고 아랫부분은 네모진 모양이다. 태백산에 있는 천제단은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