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화성 11

수원 화성 화서문

정조 20년(1796)에 만들어진 화성의 서문이다.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는 석축 부분에 홍예문을 열고 그 위에 창룡문처럼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문 앞으로 벽돌로 쌓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이익공 형태로 외목도리로 받쳤다. 익공계지붕에서 주로 쓰는 창방 위에는 화반을 배치하여 중량을 분산하는 형태로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보물 제 403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화서문 가까이 서북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알기 위한 망루인 돈대이다. 벽돌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원거리와 근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총구가 있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수원 화성 창룡문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 정조 19년(1795) 건립하였다.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2층 누각인데 비하여 단층문루 아래 돌로 쌓고 홍예문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성 밖은 성문 방어를 위한 옹성을 쌓았다. 옹성에는 14개의 총구가 있어 가까이 접근하는 적과 먼 곳을 공격할 수 있게 설계하였다. 창룡문에는 빗물이 땅으로 흘러내리도록 누조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시멘트로 막아 그 역할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창룡문 부근에는 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대와 활터가 있다. 6·25전쟁으로 문루와 홍예가 크게 소실되었으나 1975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 안쪽에서 바라 본 창룡문,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누조이다. 창룡문의 옹성, 성 위의 큰 구멍은 근원거리 총을 쏠 수 있는 것이고, 세..

수원 화성 팔달문

수원 화성에는 한양의 사대문처럼 사대문이 있다. 정문이면서 북문인 장안문, 서문은 화서문, 동문은 창룡문, 남문은 팔달문이다. 팔달문은 수원이 교통의 요지로 사통팔달로 연결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면서, 옆에 팔달산이 있어 팔달문이라고도 했다. 팔달문은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문이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화성을 쌓을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보물 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의 바깥에는 성문 공격을 막기 위한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팔달문, 옹성이 견고해 보인다. 지붕이 사다리꼴 모양이다. 성 안쪽에서 바라본 팔달문

수원 화성 장안문

장안문은 화성(華城)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보통 남문을 정문으로 여기지만, 한양에서 정조가 장안문을 통해 화성행궁에 입성하기에 장안문이 정문인 것이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불렀던 이름이므로, 중화사상의 영향이면서도 정조대왕의 자신감의 표현인 듯 하다. 한편으로 장안문 안은 서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수도인 한양에서 화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장안문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문)을 만들었고,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충분한 너비와 일반 수레가 서로 비껴 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확보하였다. 장안문의 특징은 옹성과 문 좌우로 만들어 놓은 적대이다. 옹성은 성의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이 성문을 쉽게 부수지 못하..

수원 화성박물관

22일부터 진행 중인 화성문화제, 화성박물관에 가면 정조가 능행차를 할 때의 모습 등이 재현되어 있다. 정조 이후 조선왕조에는 백성들과 나라를 지켜낼 군주가 없었다.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대됨)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치를 떨면서 순조의 명을 받아 대리청정을 하여 정조의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듯 하였다. 그는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여 억울하게 벌을 당하지 않게 하였다. 모든 백성을 위하는 위민 정책을 펼치려 하였으나,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을 넘어서고, 조선시대까지 선진국이었던 중국마저도 넘어선 지 어언 30년. 그러나 ..

수원 화성장대

어제(9월22일)부터 화성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경기교총에서 직장 동료의 자녀가 혼인을 하여, 화성을 올라갔다. 수성고등학교 3학년 때 예비고사가 끝나고, 화성장대를 찾는 것이니 37년 만인 듯하다. 수원은 몰라보게 변화하였다. 120만의 거대도시로 성장한 수원의 기반은 화성을 건축한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공인 듯 하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화성 안내도 화성의 5개 포구 중 하나인 서포루, 안쪽에서 바라본 서포루 성 밖에서 바라본 서포루 성벽의 모습 수원장대 수원장대에서 바라본 화성행궁 서노대, 오늘날 다연발 포처럼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장치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수원 화성 행궁2

수원 행궁은 1996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고종 11년(1874)에 2만 냥을 들여 화성 행궁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잘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립병원이라고 할 자혜의원이 건립되고, 학교와 농산물 연구소 등이 차례로 들여와 1923년에는 거의 사라졌었다. 필자가 수원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행궁 자리에 수원 경찰서와 경기 도립병원, 신풍초등학교, 수원터미널 등이 있었다. 수원 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의 치소로 사용되었다. 전체 557칸으로 의주나 남한산성, 온양의 행궁에 비하여 규모가 크다. 동향으로 배치된 화성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이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를 세운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수원 화성축조 과학기구

2016년은 화성 축성 220주년이 되는 해이다. 화성은 정조의 주도아래 정약용과 채제공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성곽이다. 10년을 계획하여 만든 성을 2년 9개월 만에 만들었다.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성곽에 동원된 근로자들에게 성과급제로 임금을 주어 일의 능률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기계의 힘을 빌었다는 것이다. 첫째로 거중기이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거중기는 높이가 4.4m, 너비는 1.7m로 하나의 거중기를 사용하면서, 축조 경비를 4 만냥을 절약했다고 한다. 화성박물관에 있는 거중기 또 하나의 기구는 녹로이다. 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얼레에 연결하여 돌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한 도구로 높이가 11m에 이른다. 화성축조공사 때 2개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이후 궁궐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