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남한산성 13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왕궁지였다고 전해지는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있는 침괘정은 남한산성 동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 2년(1624) 수어사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침과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침과정은 '창을 베개 삼는다'라는 뜻이다. 침과정이 언제부터 침괘정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침괘정 오른쪽으로 무기고와 무기제작소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침괘정은 사무를 보던 곳으로 추정된다. 침괘정이 온조왕의 왕궁지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고 전해들었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아직 없다. 침괘정은

남한산성 남장대터

남한산성 장대는 모두 5개이다. 장대는 성을 지키기 위해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이다. 수어장대에 대해서는 blog.daum.net/hannal/16519589?category=2115684에서 소개하였다. 나머지 4개의 장대는 동장대(내,외부 2개), 남장대, 북장대 4곳이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이 남장대이다. 남장대는 광주판관 직을 배치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훈련시켰다. 정조 12년(1788) 부윤 이태영이 세웠고, 1802년 유수 김관주가 고쳐지었다는 '타운루(唾雲樓)'가 있었다고 한다. 타운루는중수하기 전에는 1층 누각이었으나, 18세기 중수하면서 2층 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남장대지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있는데, 모두 21개이다. 초석의 거리로 봤을 때..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이

경기도 성남과 광주에 걸쳐있는 남한산성에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의 사당이 있다. 남한산성과 온조왕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주장성이라고 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니 백제와는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2호인 남한산성에 있는 온조왕의 사당은 숭렬전이다. 온조왕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인조 때 수어사였던 이서 장군의 신주를 배향하고 있다. 북문에서 로타리방향으로 오다 서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350m, 서문에서는 동남쪽으로 53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숭렬전은 정조 19년(1795)에 사액이 내려지면서 숭렬전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백제 시조묘, 백제 시조 온조왕 사당, 온조왕묘, 온왕묘, 온조묘, 백제 온왕묘, 남한묘, 온조전 등으로 불리워졌다. 에..

남한산성의 황진이가 머무른 송암정

남한산성 동문에서 쭈욱 오르면 망월사이다. 하지만 망월사는 잠시 미루고 벌봉 방향으로 1.9km를 오르면 표지석이 나타난다. 바로 송암정(松岩亭)이다.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남자 여러 명이 기생 2명과 술을 마시던 중 지나가는 황진이에 반한 한 남자가 황진이에게 수작을 걸어왔다. 금강산에서 불도를 닦은 황진이가 부처님의 말씀을 설하자 이에 감동받은 기생 한 명이 이곳에서 자살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에 밤에 달이 뜨면 어디선가 노래와 통곡 소리가 함게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정조가 고사(枯死)한 소나무를 보고 벼슬을 내리고 옥관자를 붙여주도록 하였다고 하여 '대부송'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조선후기 중앙군사제도 중 수어청이 있던 곳이라 '수어장대'라 한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의 장대이다. 수어장대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화려하게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836년에 광주유수 박시수가 다시 고쳐 지을 때 현판을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이름을 지었다. 수어장대 가는 길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 상,하궐을 포함하는 행궁 담장의 정문이다. 정조 22년(1798)에 광주유수 홍억이 행궁입구에 한남루라는 루문을 대문으로 세웠다. '한남루'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루대'라는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루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위정 좌승당 뒷편에 서있는 이위정은 순조 17년(1817)에 광주유수 두실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한 사정(射亭)으로 지은 정자이다. 이위정기가 전하는데 기문은 심상규가, 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이위정기 탁본 심상규와 김정희는 20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동지였다. 심상규가 병조판서로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청나라 금석학의 대가인 옹방강과 옹수곤 부자를 김정희에게 소개해준 사람이다. 심상규와 김정희는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적이 되었다. 정순..

남한산성의 도무지 형벌의 현장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도무지'는 끔찍한 형벌인 '도모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도무지는 옛날 조선시대에 사사로히 행해졌던 형벌 도모지(塗貌紙)에서 비롯되었다. 물에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겹으로 착착 발라 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모지형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 기록에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백지사형(白紙死:일명 도모지형)벌을 받았는데, 무의식 중에 혀를 내밀어 물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 고 나와 있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는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