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한양도성 7

한양도성과 서울기상관측소

삼성강북병원을 지나 홍난파가옥을 지나면 흰색 건물이 보인다. 바로 서울기상관측소이다. 1998년 방배동으로 기상청이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요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된 것은 1883년 9월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압, 기온, 풍향 등을 3시간마다 측정하였다. 1895년에 일본에 의해 인천에 근대적인 기상관측소가 세워졌다. 서울에는 1907년 10월 1일에 정동에 세워진 경성측후소가 관측의 시작이다. 1932년 11월 10일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1번지에 중앙기상대가 만들어졌다. 준공에 맞추어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자. 경성의 저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고, 저 구름에 비가 싸여 온다. 래일은 맑고 치웁다. 그날 그날의 창공과 싸우고 긔압과 더..

한양도성 소의문

서소문(西小門)인 소의문(昭義門)은 한양도성의 숭례문과 돈의문 중간 쯤에 위치한 문이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문은 1914년 일제에 철거되어 현재는 중앙일보사 축대 옆에 홀로 표지석만 남아있다. 소의문은 태조 5년(1396)에 9월 24일 완공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태조 3년(1394) 2월 12일 서소문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 보내고 사흘 뒤에는 석장이었던 중을 효수하여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문루를 8월에 완성하게 하였다. 소의문은 소덕문(昭德門)이라 불리웠는데, 성종 3년(1472)에 예종의 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하면서 피휘(避諱)하기 위해 소의문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은 ..

한양도성 광희문

남산에서 국립극장을 거쳐 장충체육관을 지나 성곽을 따라가다보면 성문이 나타난다. 바로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이다.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조선시대에 서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 문을 통해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으로 운구했기 때문이다. 세조 2년(1456)에 서울 동남쪽인 장충동 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내고 광희문이라 하였다. 예종 원년(1469)에 음양설에 따라 기존의 문을 막고 현재의 자리에 새로 수구문을 내면서 남소문의 현판인 광희문을 갖다가 새 문에 달았다. 에 숙종 37년(1711)조에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가 없어서 후에 다시 공사를 하기로 했다’ 는 기록이 보인다. 김지하의 시 「녹두꽃」..

한양도성의 낙산과 암문

낙산(駱山)은 낙타산(駱駝山)이라 불리는데, 산의 생김새가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낙산은 태조 3년(1395)에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네 산 가운데 하나가 됐다. 동쪽 경계인 낙산의 능선을 따라 혜화문(동소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성벽을 쌓아 한성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암문(暗門)은 성문 중 하나이지만, 일반 성문과는 달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아 감추어진 곳에 성의 출입을 하게끔 되어 있다. 이곳은 유사시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통로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암문을 통해 한성대 주변이 보인다. 흥인지문으로 이어진 성곽과 여장(아래)

한양도성 사대문

숭례문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의 모습을 보고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이 ‘예(禮)를 숭상하자’는 뜻을 상징하는 나라의 큰 문입니다. 동양에서는 공자이래로 예가 정치의 근본을 이루었으며, 국가나 가정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으로 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므로 숭례문은 사람이 오고가는 문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조선을 상징하는 문이라 하겠지요. 우리 역사를 보통 전란의 역사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란이 있었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적의 큰 침입부터 현대에 와서는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4.19혁명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백성들의 애환을 함께 느끼며 유지했던 숭례문이었는데, 2008년 2월 70대 정신 나간 노인 한 사람의 어이없는 방화에 ..

한양도성 사대문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한양도성을 건설하면서 4개의 대문과 4개의 작은문(소문:小門)을 만들었다. 한자에서 인(仁)은 동(東), 의(義)는 서(西), 예(禮)는 남(南), 지(智)는 북(北)의 방향을 가리킨다. 인의예지는 때로 책의 순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한강도성의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 했다.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지(智)가 아닌 정(靖)을 사용한 것은 ‘외척이 나라 정치에 간섭을 막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편안하길 바란다’는 정도전의 뜻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흥인지문 한양도성이 건설될 때 만들어진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태조 5년(1396)에 처음 만들어지고, 단종 1년(1453)에,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각각 ..

한양도성 창의문

서쪽에는 인왕산을, 동쪽에는 북악산을 이어주는 문이 자하문(紫霞門)이다. 북소문으로 창의문(彰義門)으로 불린다. 아마도 '인조반정'을 예견한 듯 하다. '의로움을 만천하에 드러내다.'라는 뜻이니... 그러나 중립외교로 외적의 침입을 막았던 광해군을 서인으로 내몰고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창의문 밖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보가 광해군에게 미리 알려졌으나,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으려 하였다. 훈련대장 이흥립에게 궁성을 호위하게 했으나, 김류, 이귀의 반정군과 합세하였다. 안개로 바로 앞도 분간하게 힘들었으나, 반정군이 창의문을 나서자 바람도 멈추고 달이 밝아 길을 밝혔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이용되지 않았기에 창의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네가 많아 지네의 천적인 닭을 문루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