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31

홍유릉

3.1절이 지났다. 3.1절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가 고종의 독살설이다.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려다가 3월1일로 앞당긴 것이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있다. 고종 32년(1895)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 옥호루에서일본군에 의해 시신을 불태웠다.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면서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하..

조선 왕릉, 원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의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난간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세련되고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망주석은 오른쪽은 세호가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은 세호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상, 중, 하대석 부분이 꽃무늬로 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 때부터 중계와 하계가 합쳐지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을 함께 배치했다. 이곳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다. 그러나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문제점으로 현종 14년(1673)에 천릉하고난 후 영조가 묻혔다. 원래 영조는 첫..

조선 왕릉, 헌릉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은 제3대 태종(1367~ 1422)과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능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방원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종 즉위의 1등 공신인 하륜은 방원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 라고 칭찬했다.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마저도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공양왕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게 하였다. 의안대군(방석)이 세자가 되자, 태조 7년(1398)에 건국 공신인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방석과 방번은 귀양가는 중에 살해하였..

조선 왕릉, 온릉

온릉은 중종의 첫 번재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릉이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에 있는 단릉(單陵)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박원종 등이 반정을 도모하면서 신수근의 협조를 받으려고 했으나, 누이가 있기에 협조하지 않았으므로 중종이 즉위하고 왕비로 책봉된 후 7일만에 폐위되었다. 경회루에서 중종이 신씨를 잊지못하여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았다. 이 소식에 신씨는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았기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더나자 폐비 신씨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명종 12년(1557)에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친정 집안..

조선 왕릉, 파주 장릉

장릉은 세 곳이 있다. 어제 언급한 김포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후에 추존된 원종)과 구씨부인(후에 인헌왕후로 추존)이 합장된 릉이고, 파주에는 원종과 인헌왕후의 아들인 인조의 릉인 장릉이며 영월은 단종 릉이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파주 장릉은 제16대 인조(1595~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씨의 무덤으로 17세기와 18세기가 공존하는 양식의 왕릉이다. 인조는 임진왜란 중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원종)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선조의 첫 손자였기에 왕궁으로 불러들여 기르며 아꼈고, 의인왕후 박씨도 아꼈다고 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는 서인들이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와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임에 대한 부도덕성을 비판하며 일으킨 반정에 의하여 임금이 되었..

조선 왕릉, 김포 장릉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릉이 있다. 바로 김포 장릉이다. 인천시가 건설하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왕릉의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고 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애써서 마련한 아파트를 어떻게 할지 난감한 지경일 것이다. 이 왕릉은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으로 제16대 인조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어머니 인헌왕후(1578~1626) 구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신중한 성격과 효성이 남달랐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가까이서 호종하였기에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정원군을 견제하였다. 특히 정원군이 살던 곳으로 집터에서 ..

조선 왕릉 정릉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가면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왕비이자 서울에서 혼인한 경처(京妻)로 있다가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앙비가 된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과 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가 있으며, 태조 5년(1396)에 세상을 떠났다. 정릉은 원래 한성부 황화방(지금 중구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축소되었다. 정동의 유래도 '정릉이 있던 곳'이라 붙여진 명칭이다. 현종 10년(1669)에 왕후의 릉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릉을 조성한 후 제사를 지내자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 '이 비를 신덕왕후의 원을 풀어주는 비'라고 하여 '세원지우(洗怨之雨)'라고 불렀다.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로 태조가 신덕왕후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하여 17..

조선 왕릉 영회원

비운의 여인 민회빈 강씨(1611~1646)가 잠든 곳이다. 민회빈의 본관은 금천이며, 우의정 강석기의 딸이다. 인조 5년(1627)에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루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 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볼모가 되었다가 1644년 귀국하였다. 청에 볼모로 있는 동안 소현세자가 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정치와 외교 문제, 그리고 서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민회빈은 볼모로 잡혀온 사람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민회빈은 청나라를 상대로 면포, 호피, 종이, 약재, 생강 등의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볼모로 오랜 기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역으로 남은 이익으로 농토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무역과 농업을 통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청나라에 포로가 되어 노비로 팔려간 조선인을 사서 속환시켜 농장에서..

조선 왕릉 광해군묘

경기도 남양주 송릉리에는 광해군이 잠들어있는 묘가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1608년 34세에 즉위한 조선의 제15대 왕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로 왜군을 겪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영창대군과 형인 임해군 사이에서 왕권 쟁탈로 모두 죽이고, 인목태후를 경희궁에 유폐하면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왕으로 즉위하면서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는 한편 중립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대외적으로 외교정책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쫓겨나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1641년 제주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묘 근처에 묻히고 싶다’는 광해군의 소원에 따라 이곳에 묻히게 되..

조선 왕릉 연산군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가면 연산군묘가 있다. 조선의 10대왕으로,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성종 7년(1476)에 태어났다. 성종 10년(1479)에 윤씨가 폐비가 되면서 정현왕후 윤씨의 보살핌으로 친모를 정현왕후로 알고 지냈다. 성종 25년(1494)에 성종이 승하하고 즉위하였다. 왕이 되고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생모가 폐비 윤씨라는 것을 알았지만, 임금으로 3년간 무탈하게 보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키면서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경연도 폐지하면서 오로지 술과 여자에 빠졌다.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고, 심지어 윤순의 처와 부정한 관계를 맺으며, 윤순은 아내를 팔아 출세하는 ‘왕팔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연산군 12년(1506)에 박원종, 성희안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