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31

조선 왕릉 융릉

융릉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와 헌경의황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영조 38년(1762)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만들고,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가 1776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정조 13(1789)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순조 15(1815)에 헌경의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광무 3년(1899)에 장조황제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다른 릉과 달리 비각 안에는 두 개의 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조선시대..

조선 왕릉 건릉

융건릉은 용주사에서 서쪽으로 약 1킬로미터 정도 가면 도착한다. 정문 오른편에 있는 융릉은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일명 : 사도세자, 후에 장조로 추존)와 경의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왼편의 건릉은 정조와 효의 왕후의 합장릉이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것을 항상 슬퍼하며 지냈다. 그래서 양주 배봉산에 있는 현릉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다. 어느 날 정조대왕이 융릉을 찾았는데,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많아 소나무를 갉아 먹자, 정조대왕이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문에 화성이 ..

조선 왕릉 사릉

사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에 위치한 단종 왕후인 정순왕후 송씨의 단릉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올렸다. 단종과의 만남은 단종의 큰할아버지인 양녕대군과 숙부인 수양대군의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가례를 올린 지 1년 만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어려움이 닥쳤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알려 세조가 알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고, 나중에는 관비가 되었다..

조선 왕릉 정릉(靖陵)

정릉(靖陵) 선릉의 동쪽에는 정릉(靖陵)이 자리잡고 있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단릉(單陵)이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506년 박원종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하여 노력하였다. 조광조를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현량과와 향약을 실시하여 지방의 향촌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삼포왜란때 일본의 침입을 물리친 후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인쇄술의 발달로 을 편찬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39년만인 1544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서삼릉의 희릉에 있던 것을 풍수상 좋지않아 릉을 옮겨야 한다는 핑계로 문정왕후가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으나, 실은 본인이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정왕후..

조선 왕릉 선릉2

정현왕후 릉 정현왕후 윤씨는 세조 8년(1462 )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성종 4년(1473)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가 되었다. 성종10년(1479)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가 되고, 성종 11년(1480)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아버지 윤호와 육촌인 윤필상과 협력하여 윤시를 폐비시켰다고도 전한다. 중종인 진성대군을 낳고,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일어난 중종반정 때 반정의 주도세력이 진성대군의 올립을 주장하자, 이를 승락하여 중종이 즉위하며 자순대비가 되었다가 중종 25년(1530)에 경복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릉의 정자각에서 동쪽에 릉이 위치하여 동원이강릉이다. 선릉은 수난을 많이 겪었다. 선조26년(1593), 임진왜란 와..

조선 왕릉 선릉

서울 강남에 가면 공원같은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선정릉이다. 선릉은 동원이강릉이다. 같은 영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정자각 왼쪽(서쪽)에는 성종의 릉이, 오른쪽(동족)에는 정현왕후의 릉이다. 성종은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됨)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예종이 1469년 승하하자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13세에 경복궁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은 원래 왕위 계승에는 상관이 없던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예종에게는 제안대군이, 성종에게는 친형인 월산대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인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노력에 의해 조선 9대 임금으로 즉위하였기에 왕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임금으로 즉위한 후에 제왕학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임금이 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하는 ..

조선 왕릉 의릉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뒷편에 천장산이 있다. 조선시대 ‘하늘이 숨겨둔 곳’이라 하여 ‘천장산(天藏山)’이라고 했던 곳이다. 이곳에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과 계비 신의왕후 가 묻혀있는 의릉이 있다. 예전 의릉은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가 있어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부터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숙종의 후손을 막는다며 경종의 급소를 공격하여 후손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더구나 첫 부인인 단의왕후 심씨가 숙종 44(1718)에 세상을 떠나고,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14세의 선의왕후와 혼례를 치렀다. 17세 연하의 선의왕후는 경종이 임금이 된 지 4년만에 세상을..

조선 왕릉 정릉

정릉-신덕왕후 강씨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나 20살 연상인 이성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난 일화는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 유씨의 일화와 같다.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으니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을 청하자,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이성게가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소리치자, 여인은 “목마름이 심할 때 갑자기 찬물을 마시면 배탈이 납니다. 그래서 버들잎을 잎으로 불며 천천히 드시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에 이성계는 감탄을 하였다. 이때 강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신덕왕후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을 탓하는 이성계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걸림돌은 제거해야 한다..

조선 왕릉 수릉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는 사극, '구르미 드는 달빛' 의 주인공인 효명세자 (후에 익종으로, 다시 고종 때 문조황제로 추존됨).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1809년 태어났다.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순조는 정치를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하에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조는 38세 되던 1827년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대리청정을 위임받은 세자는 개혁 정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많은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부정으로 얼룩져 안동김씨의 등용문이었던 과거가 김노, 홍기섭, 김노경, 이인부, 김정희와 같은 전국의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나아가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변사 당상들을 감봉 조치하여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초산 출..

조선 왕릉 인릉

요즈음 방영되는 '구르미 그린 달빛'이란 드라마가 있다. 내가 가장 안타까운 우리 역사 중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인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의 이야기를 다룬 모양이다. 원래 사극 드라마는 과장이나 고증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보지 않는다. 그래도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이어서 관련 유적을 찾았다. 바로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이다. 헌릉은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 민비의 쌍봉릉이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비의 합장릉이다. 바로 효명세자의 아버지가 순조이다. 순조는 11세에 임금이 되어 처가인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려고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양위를 하여, 개혁 정치를 이끌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안동 김씨 등 기득권층이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결국 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