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성남의 인물 8

성남의 충신, 남이흥 장군

인조5년(1627)에 남이흥 장군은 3도 부원수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였다. 이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청국)의 3만6천 대군이 침공하였다. 남이흥 장군은 안주성에서 3천여명의 군사로 맞섰지만,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만주족을 화약고로 끌어들여 화약을 점화하여 많은 적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인 남유 장군은 노량해전이 있은 뒤 3일 후 왜군에 의해 희생되었고, 남이흥 장군이 평안도에서 죽음을 당하자 모친은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하여 죽었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 마는 전몰 군사와 그 미망인과 자식들이 잿더미속에서 울게 됨이 한스럽다.” 고 했다. 인조는 남이흥 장군의 전사에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입고계신 곤룡포..

남한산성을 건설한 벽암각성선사와 장경사

충북 보은에 한 이름없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선비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이 높아 고을 사람들은 그를 보통 김생원이라 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아 농사도 짓고 부인은 빨래와 같은 허드렛일을 하였다. 생원의 내외는 비록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학문에 힘썼다. 생원의 부인 박씨도 시서예악 (詩書禮樂)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결혼한 지 10여 년 지나도 아이가 없었다. 부인 박씨는 법주사 부휴선사를 찾아뵙고 조그마한 지장조살상 한 분을 모시고 집에 돌아와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다. "지장보살님 ! 지장보살님께서는 영험하시니, 저희 부부에게 자식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아들이면 더욱 더 좋은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저희에게 가피를 주옵소서...." ..

강정일당

강정일당(姜靜一堂)은 정조-순조 년간 활동했던 여성이자 성리학자이다. 충청도 제천 근우면 신촌에서 영조 48년(1772)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이고, 세조 때 공신인 강희맹의 13대손이다. 조부인 강심환과 부친인 강재수가 일찟 세상을 떠난 집안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성리학자 권상하의 동생인 권상명의 현손이다. 어머니 권씨의 태몽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옆에 함께 온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에 덕을 갖춘 사람이 있으니 이제 너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꿈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태몽에 따라 ‘지덕(至德)’이라 지었다 . 정일당은 1791년 20세에 윤광연과 혼인했지만, 윤씨 집안도 어려워 3년 후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정일당을 보고 매우 만족해하며 “우리 가문이 부흥하겠..

둔촌 이집

성남시 중원청소년수련관으로 가다보면 묘역 입구에 둔촌 이집의 신도비가 있다. 둔촌 이집 신도비 둔촌 이집은 성남 출신 인물로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고 애쓴 관리 중 한 명이다.그는 공민왕 때 정치를 좌지우지 한 신돈을 비판했다가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여경북 영천으로 피했다.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개경으로 올라와 판전교시사(고려시대 유교 경전 및 여러 도서의 인쇄 및 보관을 하던 관청)직을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오늘날 성남으로 내려와 여주를 오가며 지냈다.집과 호마저 둔촌으로 바꾸고 시와 학문에 힘썼다.유교집으로 이 있다.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크게 활약하고 있다.광주 이씨로 대표적인 후손은 한음 이덕형이다.이렇게 성장한 배경에는 이집이"금을 광주리로 주는 것보다 경서..

여성독립운동가 황에스더

황에스더 선생은 1892년 4월 19일에 한학자인 황석청의 7남매 중 넷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간레’라고 불리던 황에스더 선생은 어머니가 동생인 신덕을 낳다가 위험에 빠졌을 때, 미국인 홀 의사에 의해 건강을 되찾자 집안 식구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황에스더 선생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스더’라는 세례명에 따라 황에스더, 황애덕, 황애시덕(愛施德)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1904년 두 동생이 모두 학교에 입학한 것에 자극받아 자신도 학교에 가려고 했으나, “10세가 넘은 처녀는 학교를 보낼 필요가 없다.” 라고 아버지가 반대하자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1905년 평양 정진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 정진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10..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

분당에 중앙공원에는 한산이씨의 묘역이 있다. 이색의 4대손인 봉화현감 한원군 이장윤(토정 이지함의 조부)부터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분당과 관련있는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성리학자이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함께 3은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하자 벼슬을 버리고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시를 지으면서 지냈다. 고려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6천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저서에 와 등이 있다.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이색은 열네 살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 건너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려로 돌아온 뒤, 공민왕에게 토지 제도의 개혁, 국방 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

독립운동가 한순회 선생님

한순회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한진기의 셋째 아들로 평택군 포승면 내기리에서 태어나 광주군 돌마면 율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의 한영우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영창으로부터 수학하여 4서 3경에 능통하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1919년 3.1운동을 지켜보면서 독립을 위해 국민을 계몽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광주군 천도교구장이던 선생은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될 때에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지회 활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이후 신간회가 해체되자, 김재계․최준모와 함께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일본을 한반도에서 쫓아내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특별 기도문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외우게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으로부터 독..

분당구 백현동 출신 매국노 이완용

매국노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그의 묘가 전라북도 익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익산이라고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묘는 파묘가 계속되자 후손들에 의해 화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의 정치가이다. 한때 조선의 개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을사조약 때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 이완용은 고종 때 벼슬길에 나서, 왕세자의 교육을 맡은 데 이어 서른여덟 살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그는 학부대신을 지내며,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근대적인 교사 양성 사업을 펼쳐 우리 교육사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동양 여러 나라가 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 평화론’에 현혹되어 일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