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그의 묘가 전라북도 익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익산이라고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묘는 파묘가 계속되자 후손들에 의해 화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의 정치가이다.
한때 조선의 개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을사조약 때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
이완용은 고종 때 벼슬길에 나서, 왕세자의 교육을 맡은 데 이어 서른여덟 살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그는 학부대신을 지내며,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근대적인 교사 양성 사업을 펼쳐 우리 교육사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동양 여러 나라가 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 평화론’에 현혹되어 일본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해서 을사조약을 맺게 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아 고조의 퇴위를 강요하고,
순종이 왕이 되자 정미7조약을 맺게 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다 한일 합방에 앞장서 1910년 마침내 조국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그는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3차례나 경고문을 발표하는 등 평생을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