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 중원청소년수련관으로 가다보면 묘역 입구에 둔촌 이집의 신도비가 있다.
둔촌 이집 신도비
둔촌 이집은 성남 출신 인물로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고 애쓴 관리 중 한 명이다.
그는 공민왕 때 정치를 좌지우지 한 신돈을 비판했다가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여
경북 영천으로 피했다.
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개경으로 올라와
판전교시사(고려시대 유교 경전 및 여러 도서의 인쇄 및 보관을 하던 관청)직을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오늘날 성남으로 내려와 여주를 오가며 지냈다.
집과 호마저 둔촌으로 바꾸고 시와 학문에 힘썼다.
유교집으로 <둔촌잡영>이 있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크게 활약하고 있다.
광주 이씨로 대표적인 후손은 한음 이덕형이다.
이렇게 성장한 배경에는 이집이
"금을 광주리로 주는 것보다 경서를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는 가르침 때문이다.
영호루에 머물다가 떠남 (映湖樓留別)
- 영천으로 신돈의 화를 피해가는 도중에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시로 추정된다.
둔촌 이집의 불안한 마음이 실려 있다.
花山客半月 今日向他州(화산에서 나그네살이 반달 되었는데 오늘은 딴 고을로 향하네.)
縱有重來約 那堪惜別愁 (비록 다시 올 기약은 있지만 석별의 근심을 어이 견디리.)
船開芳草渡 酒盡夕陽樓 (나룻배는 방초 핀 나루를 여는데 술은 석양의 다락에서 떨어졌구나.)
行後何時了 風塵滿馬頭(떠도는 삶은 언제나 끝나려나. 바람에 이는 먼지가 말머리에 자욱하네.)
입추 날 김구용에게 주다 (立秋日寄敬之)
- 열한 살 아래인 김구용이 친원파인 이인임의 정치에 반대하다가 죽주로 귀양갔다가 여주로 돌아와 있으 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적은 글이다. 한편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우니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江海無家客 山林有髮僧 (강과 바다엔 집 없는 손이요 산림엔 머리 기른 중이라.)
焚香蘄道泰 對食願年登 (분향하며 도가 태평하기를 바라고 밥 먹으며 풍년 들기를 기원하네.)
睡起微涼入 吟餘老病增 (잠 깨니 가볍고 서늘한 기운이 들고 시 읊으니 노인의 병이 더하네.)
玉人何處所 咫尺是驪興(그대의 거처가 어디인가. 지척이 바로 여흥이라네.)
(遁村雜詠)
이집의 묘,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나타나는 무덤 양식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둔화문 안에 있는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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