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성남의 인물

남한산성을 건설한 벽암각성선사와 장경사

윤의사 2020. 9. 9. 16:58

 

 

충북 보은에 한 이름없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선비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이 높아 고을 사람들은 그를 보통 김생원이라 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아 농사도 짓고 부인은 빨래와 같은 허드렛일을 하였다.

생원의 내외는 비록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학문에 힘썼다.

생원의 부인 박씨도 시서예악 (詩書禮樂)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결혼한 지 10여 년 지나도 아이가 없었다.

부인 박씨는 법주사 부휴선사를 찾아뵙고 조그마한 지장조살상 한 분을 모시고 집에 돌아와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다.

"지장보살님 ! 지장보살님께서는 영험하시니, 저희 부부에게 자식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아들이면 더욱 더 좋은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저희에게 가피를 주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박씨의 꿈에 웬 스님이 맑고 깨끗한 거울을 선물하며 말했다.

" 부인께서는 이제 옥동자를 잉태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둥글고 맑은 거울을 징표로 드리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낳으면 고이고이 잘 기르십시오. 반드시 우리 조선을 위한 크나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

"거울을 제게 주시니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맑고도 둥근 거울이니 아드님의 이름을 '정경'이나 '징원'이라 하시면 되겠습니다.

소승의 생각에는 정경보다는 징원이 나을 듯 싶습니다."

" 징원이라고요? 아들도 낳기 전 이름부터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박씨는 아이를 가졌고, 그날로부터 태교를 실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삿갓을 깊숙이 내려 쓴 스님이 탁발을 하고 있었다.

스님에게 옷과 식량을 시주하자 스님이 말했다.

"부인께서 태교를 하시는데,  이 <법화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태교에는 뭐니뭐니해도 법화경이 으뜸이지요."

박씨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해 놀라며 물었다.

"제가 임신한 것을 스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장차 크게 쓰일 아이이니 잘 키우십시요."

박씨가 스님을 알아보고자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스님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스님이 섰던 자리에는 <법화경>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박씨는 열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법화경>을 읽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자 이름을 징원이라 했다. 

다섯 살이 되자 벌써 <천자문>을 떼었다. 여섯 살에 <효경>과 <명심보감>을,

일곱 살에 <오언당음>과 <칠언당음> <소학> <자치통감>을 통달하였다.

9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0세에 화산으로 출가하여 설묵(雪默)스님을 스승으로 수행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우기도 하였다.

각성 벽암선사의 활약에 대하여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조선)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며 스님을 치켜세웠다고 전한다.

불도징은 서역에서 온 승려로 남북조 시대 후조의 잔인하기로 소문난 임금인 석륵을 교화시켜

북조에 불교 문화를 꽃피운 스님이다. 석륵의 군사 책사로 있으면서 적들의 동태를 미리 예상하고

그들에게 항복을 받아 후조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도안은 불도징의 제자로 불교가 샤머니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불교를 쉽게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문 경전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계율을 엄하게 만들어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새롭게 일어난 불교에 대해 북조의 전진왕 부견이 도안선사를 모시기 위해 10만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도안선사는 부견을 설득하면서 자신이 전진으로 가 불교를 알리겠다고 하면서

부견이 거느린 군사를 돌아가게 하였다.

한때 스승인 선수(善修)스님이 무고로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처벌을 받을 위기였으나,

광해군이 죄를 물을 때 답하는 벽암 각성선사의 엄숙하면서도 굳은 뜻의 대답에 감탄하여 방면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리 승려들도 임금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함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라 일이 시급하니 앉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고 궐기를 호소했다. 각성 벽암선사는

오랑캐를 쳐부수자

는 격문을 받고 모인 승병과 주민들로 3000명의 항마군(降魔軍)을 이끌고 호남 지역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항마군을 해산했다고 전한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스님들과 남한산성의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하는데 힘썼다.

인조는 스님의 공을 인정해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는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선물했다.

각성 벽암스님은 무주 적상산성의 규정도총섭이 되어 이곳에 보관 중인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하여

안국사(安國寺)에 머물렀다가, 1659년에 화엄사에서 앉아 입적하였다.

벽암각성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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