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13

판교그린타워

판교크린타워 내 소각장 전망대는 판교신시가지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판교기반시설로 건설하여 2011년에 성남시에 기부채납한 시설이다. 판교크린타워의 높이는 서울공항의 비행안전2구역에 해당되어 높이가 제한되어 있어 현재 전망대의 높이는 47m이다. 초고층은 아니지만 판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승강기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바로 옆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물론 판교·분당신시가지와 청계산을 볼 수 있으며 전망대는 북카페로 설치되어 현재 성남시민의 여가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경기문화재단 옛길 참조)

분당에 말무덤이

요즈음에는 반려동물과 생활을 하다보니, 반려동물이 생을 다하면 전문적으로 장례를 치루어주는 업체까지 등장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사람팔자보다 반려동물팔자가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분당 중앙공원에 가면 조선시대 만들어진 말의 무덤이 있다. 영월에는 호랑이 무덤이 있으며, 전남 임실이나, 경북 선산과 경주에는 개무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말의 무덤을 흔하지 않다. 높이는 50-80cm, 직경은 440cm 정도로 임진왜란 때 상주 전투에서 전사한 이경류의 말무덤이다. 이경류는 조방장 변기의 참모로 상주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상주판관 권길 등과 함께 전사하였는데. 이경류의 집에서는 전혀 전사 소식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경류의 말이 주인의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집으로 오면서 비로..

왜 판교라고 했을까?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라고 했다가, 1914년 너분배를 합쳐 판교리로 바뀌었다. 1973년 성남시 판교동이 되었다. 판교동(板橋洞)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청계산에서 시작된 운중천에 널판지로 다리를 놓고 다녀서 '널다리'라고 부르다가 '너더리'로 바뀌었다. 너더리를 한자로 표기하면 '판교(板橋)'라 쓰인다. 1530년에 만들어진 에 광주군 역원군에 판교원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부터 불리운 것으로 추정된다. 판교원은 한양에서 영남길로 가던 관리들이 이곳에서 말이나 숙박, 식사를 하던 곳이다. 지금은 판교가 낙생을 포함하지만, 일제식민지시대에는 낙생면 판교리였다. '낙생(樂生)'의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오늘날 백현동에 낙성시장이 있었는데, '낙성(落城)'이 '낙생'으..

판교 화랑공원

동판교에는 두 개의 공원이 시민들의 휴식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한 곳은 산과 어우러져 있으면서 시민들에게 피톤치드를 주고 있는 낙생대공원이고,다른 한곳은 화랑공원이다.화랑공원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첫째는, 이곳이 용인에서 청계산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한양길이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9곳,그 중 판교를 지나는 길은 영남길이다.용인을 지나 판교를 거쳐 청게산을 넘으려니,이곳에서 쉬어야만 했다.판교에는 고려 말기 조문흠에 의해 판교원이 중건되어관리들의 역원이 있었기에부근에는 주막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막 중에는 '화랑'이라는 주모가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화랑은 주막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그리고 화랑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묻히니 ..

판교박물관

판교박물관은 판교를 개발하면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문제는 고분군이었다.전문가들은 고분은 발견된 그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였다.그렇지만 한국주택토지공사에서는 고분을 보존한 상태에서 개발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바로 고분을 통째로 옮겨 보존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판교박물관이다.1600년 이전의 사람들보다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대는 5미터 정도 높아진 것이다.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이 발견되면서공주에서 발견된 것을 가지고일본이 주장하던 자국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뒤집어지게 되었다.또한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이 발견되어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이 밝혀졌다.이곳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다보니고구려의 횡혈식석실분..

탄천

용인에서 시작하여 분당과 성남을 거쳐 송파에 이르러 한강과 만나는 탄천은 ‘숯내’, ‘수내’, ‘순내’라고도 불린다.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 따라 검천, 험천, 머내, 천호천, 마희천(머흐내) 등으로도 불리우며, 35.6km에 이른다. 탄천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염라대왕이 저승사자에게 삼천갑자(18만년)를 살았다는 동박삭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동박삭은 재주가 뒤어나다보니 저승사자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 저승사자가 개천에서 숯을 빨았다. 이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보더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고 하여, 저승사나는 나그네가 동방삭임을 알아채고 저승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후 ‘숯을 빨던 하천’이라 하여 ‘숯내’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탄천(..

죽주산성과 송문주장군

죽주산성은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있는 산성이다. 고종 23년(1236)에 죽주방호별감 송문주장군이 몽골군과 15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한 산성이다. 몽골군이 여섯 차례 침입한 고려에서 처인성 전투와 함께 고려군이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죽주산성은 조선시대에도 한양에서 영남으로 갈 때 추풍령과 죽령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둘레는 약 1688m이고 원래 높이는 6∼8m(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이다. 죽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송문주장군은 고종 18년(1231)에 귀주성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

성남의 탄생

남한산성 남쪽에 있는 도시,그래서 성남이라.원래 성남은 광주군 중부면에 새로 조성한 도시이다.1969년 5월 용두동과 마장동, 청계천의 주민 2만 여 세대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하지만 상하수도시설 등 생활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각종 환경 문제가 발생했다.일자리마저 구하기가 힘들어 이주민들의 생활고는 ㄷ저욱 어려워졌다.그리하여 1971년 8월 10일 '일자리를 달라!', '토지 불하 가격을 내려달라!'며대규모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이것이 도시빈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50년이 가까이 지난 오늘날 성남은 분당과 판교의 신도시 건설로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생기있는 도시가 되었다.-청계천박물관 설명문 참고 이 소설의 주인공 권씨는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해서 입주권을 산 ..

영남길

조선시대 서울에서 일본으로 이동하는 길로 ‘조선통신사길’ 또는 줄여서 ‘사행길’로 불렸던 영남길이 있다. 영남길은 조선시대 한성과 동래를 잇는 간선도로로 지난 1910년까지 존재했다. 1607년부터 200여 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어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해준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에 전해주는 중간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통신사는 한류의 시초라 하겠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표지석이 많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는 것은 많지 않다. 표지석을 만들었으면 관리를 잘하고,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인시청 앞에 설치된 사행길 표지석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동래를 잇는 영남길 중 석성산을 넘어 시청 앞을 지나 양지로 향하는 곳에 세워진 표지석, 하지만 ..

석성산을 가다

오늘은 학생들과 함께 석성산을 갔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서울가는 한양길이었다. 석성산이라는 말은 이곳에 할미산성(고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이니 오래된 성이라고 하겠다. 돌로 샇은 성이 있다하여 '석성산'이라고 하였다. 약 30여명의 학생을 이끌고 석성산을 갔다. 오랜만에 풀냄새와 나무냄새에 흠뻑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갔다. 학생들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 요즈음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것, 20년 후의 모습 등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덧 정상에 도달했다. 아이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도 많이 나눈 하루였다. 일년에 2-4회씩 하는 행사지만 할 때마다 의미가 남달랐다. 석성산 표지석 석성산에서 바라본 동백 석성산에서 바라본 포곡(나무가 가려 삐죽 보이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