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7

판교 화랑공원

동판교에는 두 개의 공원이 시민들의 휴식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한 곳은 산과 어우러져 있으면서 시민들에게 피톤치드를 주고 있는 낙생대공원이고,다른 한곳은 화랑공원이다.화랑공원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첫째는, 이곳이 용인에서 청계산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한양길이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9곳,그 중 판교를 지나는 길은 영남길이다.용인을 지나 판교를 거쳐 청게산을 넘으려니,이곳에서 쉬어야만 했다.판교에는 고려 말기 조문흠에 의해 판교원이 중건되어관리들의 역원이 있었기에부근에는 주막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막 중에는 '화랑'이라는 주모가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화랑은 주막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그리고 화랑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묻히니 ..

판교박물관

판교박물관은 판교를 개발하면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문제는 고분군이었다.전문가들은 고분은 발견된 그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였다.그렇지만 한국주택토지공사에서는 고분을 보존한 상태에서 개발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바로 고분을 통째로 옮겨 보존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판교박물관이다.1600년 이전의 사람들보다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대는 5미터 정도 높아진 것이다.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이 발견되면서공주에서 발견된 것을 가지고일본이 주장하던 자국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뒤집어지게 되었다.또한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이 발견되어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이 밝혀졌다.이곳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다보니고구려의 횡혈식석실분..

탄천

용인에서 시작하여 분당과 성남을 거쳐 송파에 이르러 한강과 만나는 탄천은 ‘숯내’, ‘수내’, ‘순내’라고도 불린다.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 따라 검천, 험천, 머내, 천호천, 마희천(머흐내) 등으로도 불리우며, 35.6km에 이른다. 탄천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염라대왕이 저승사자에게 삼천갑자(18만년)를 살았다는 동박삭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동박삭은 재주가 뒤어나다보니 저승사자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 저승사자가 개천에서 숯을 빨았다. 이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보더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고 하여, 저승사나는 나그네가 동방삭임을 알아채고 저승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후 ‘숯을 빨던 하천’이라 하여 ‘숯내’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탄천(..

석성산을 가다

오늘은 학생들과 함께 석성산을 갔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서울가는 한양길이었다. 석성산이라는 말은 이곳에 할미산성(고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이니 오래된 성이라고 하겠다. 돌로 샇은 성이 있다하여 '석성산'이라고 하였다. 약 30여명의 학생을 이끌고 석성산을 갔다. 오랜만에 풀냄새와 나무냄새에 흠뻑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갔다. 학생들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 요즈음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것, 20년 후의 모습 등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덧 정상에 도달했다. 아이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도 많이 나눈 하루였다. 일년에 2-4회씩 하는 행사지만 할 때마다 의미가 남달랐다. 석성산 표지석 석성산에서 바라본 동백 석성산에서 바라본 포곡(나무가 가려 삐죽 보이는 아쉬움이 있다.)

성남 판교의 항일의병운동기념탑

대얼마 전 성남 판교에 항일의병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말기의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애국지사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된 정미7조약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은 을사늑약을 전후해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 중에는 성남 판교에도 있다. 바로 동천 남상목 선생이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각종 전쟁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낙생면 하운산리의 산림을 마구잡이로 벌목하면서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

김대건 신부 生居地, 은이성지

김대건은 조선 유교 사회의 보수 세력에 의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온 몸을 바쳤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한 참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어둠의 장막을 뚫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간 개척자였다. 김대건의 어릴 때 이름은 재복,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김대건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증조할아버지가 1814년에 순교하였다.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용인 양지면 은이성지로 숨어들었다. 훗날 그의 아버지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깊은 신앙심으로 기꺼이 시련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순조 때 조선 교구가 만들어지고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선인 신부에 대..

실학을 체계화시킨 유형원

유형원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에 있는 정배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유형원의 묘는 사망 직후에 만들어졌다가 1971년에 묘역을 다듬으면서 41M의 곡장을 만들었다. 봉분 앞으로 경계석이 정돈되어 있으며, 경계석의 중앙 부분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오른쪽에 17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비의 총높이는 160㎝, 비신 높이 136㎝, 폭 59㎝, 두께 23㎝이다. 봉분의 양쪽에는 금관조복을 착용하고 있는 문인석이 있으며, 신체의 사이즈가 맞지 않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모순을 주장하는 유형원처럼 문인석의 얼굴도 웃음을 주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 효종 때의 실학자이다. 그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해 실학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