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경복궁 15

경복궁 소주방의 생물방

복회당, 생과방, 생것방이라고 불리는 생물방(生物房)은 임금의 점심상이라고 할 낮것상과 별식이나 외찬 때는 내소주방 내인과 함께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 임금의 후식과 별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잔치 때 각종 떡과 각색 다과류를 포함해 음식에 꽂는 꽃인 상화도 만들었다.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이 왔을 때에 다과상을 차려서 대접하는 곳이다. 생물방은 본채로서 정면 11칸, 측면 2칸의 총 22칸으로 된 ‘ㅡ’자형 건물에 동, 서행각 각각 5칸, 남행각 9칸이 ‘ㄷ'자형으로 연결되고 동외행각 23칸이 있다. 생물방의 외부 전경 생물방의 내부 전경 1874년 순종의 3.7일 사찬상 생물방의 부엌 소주방지 우물은 북궐도에는 방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형의 우물로서 부채꼴 모양의 석재를 원형으로 엇..

경복궁 외소주방

내소주방과 함께 우물을 사이에 두고 외소주방이 있다. 외소주방은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곳입니다. 밧소주방, 밖소주방 등으로 불리는 외소주방에선 연회음식 등 각종 잔칫상을 준비하였습니다. 설날과 단오, 추석과 작은 설인 동지 때에 준비하는 음식과 왕과 왕비의 생일, 궁 밖에서 살고 있는 왕족의 생일 및 관례가 있을 때 잔치 음식을 준비하였다. 또한 궁궐 내의 진연, 진찬, 회작으로 불리는 큰 잔치와 선원전 차례, 고사가 있을 때에도 음식을 준비했다. 외소주방 입구 외소주방 내부 모습 고종의 등극 30주년을 기념해 차린 외진찬 모습

경복궁 내소주방

드라마 '대장금'이 한창 인기있던 시절, 그러나 경복궁에 대장금이 음식을 하던 공간은 없어졌다. 바로 일제 강점기에 없어진 것이다. 이 소주방이 경복궁에 지난 5월 2일 복원되었다. 소주방은 강녕전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왕에게 올릴 음식을 장만하던 곳이다. 생물방, 외소주방, 내소주방 같이 역할을 지닌 건물과 나인들이 생활하던 공간이 있다 세 건물은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졌고, 가운데에 마당이 있다. 3개 건물은 모두 부엌과 방, 곳간, 대청을 두고 있다. 2개 또는 3개씩 부엌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에 방 서너 칸의 조그만 방이 있다. 반면 대청 공간은 조리하기 편하게 건물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배치돼 있다. 긴 회랑에 창고를 만들고, 넉넉한 사각 건물에 많은 일꾼들이 함께 일할 수 있..

경복궁의 물안개 낀 경회루

겨울답지 않게 비가 많이 왔다. 유홍준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경복궁 근정전의 박석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바로 비가 올 때라고 하더군요. 박석 사이로 흐르는 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부지런히 준비를 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비가 제법 내렸다. 이제 박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경복궁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근정전에 들어가니 역시나였다. 박석 사이로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있었다. 아쉬움만 가득했다. 근정전에서 바라본 북악산에 운무가 끼었다. 운무에 싸인 북악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청와대 뒷산인 운무만큼 차기 대통령도 지금까지와 달리 5년 뒤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래본다. 경회루로 오..

경복궁 근정전 박석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박석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화도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깔아놓은 것이다. 자연 그대로 돌을 깔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울퉁불퉁한 돌이다보니 사람들이 가볍게 뛰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하겠다. 박석과 박석 사이에는 잔디도 나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가죽이나 옷감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 밑창이 얇았기 때문에 햇볕에 데워진 박석은 따끈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박석과 박석 사이에 잔디를 심은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을 것..

경복궁 경회루

경회루는 국가의 중요한 잔치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태조 때 처음 만들어졌으나, 습지에 연못을 만들어 작은 집을 지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태종은 박자청에게 명하였다. 박자청은 신분은 미천했으나, 한성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조판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태종과 박자청은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못을 크게 파고 못 속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2층의 다락집을 지었다. 그 후 세종과 성종 때 개수공사를 하였으며, 특히 성종 때는 돌기둥에 용머리를 새겼는데, 어찌나 생동감이 있었던지 유구국의 사신이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회루는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건축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불이다. 흥선대원군은 불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