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8

상하이 주가각(朱家角)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수향(水鄕)으로 '상하이의 베니스' 라고 불리는 주가각은송원[宋元] 시대부터 유명한 마을로, 각리[角里]라고도 불렸다.각리는 외곽, 변두리 지역을 뜻한다.그러므로 주가각은 주(朱)씨가 모여사는 변두리, 외곽이라 하겠다.수나라 양제는 남쪽의 물산을 화북지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북경에서 항주까지 무려 1,700여 km 운하를 건설하였다.기존의 강들을 연결하는 운하였다.그리고 운하 양안에는 벼드나무를 심었다.운하를 따라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는 장관일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수양제가 심은 버드나무라 하여 '수양버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주가각도 운하로 만들어진 곳으로 수심은 2m 내외라 한다.일선가(一线街)라 불리는 동쪽 팡성챠오에서 서쪽 미주농까지 약 1km가 물위의 도시라고 불리울만큼..

중국 2024.05.18

상하이사범대 위안부 역사 박물관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로 나갔던 분들의 가슴아픈 사연이 안타까움을 더해가고 있다.중국도 마찬가지이다.상하이에 있는 상하이사범대 원위안루 2층에  있는 위안부역사박물관은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중국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박물관으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입증하는 각종 사료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긴 유물, 대일 배상 요구 활동 관련 자료, 학술연구 성과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193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이후 중국 내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위안부가 운영되었다.1938년 1월 13일, 상하이에 일본군이 직영하는 대형 위안소인 '양가택 위안소'가 세워졌다.일본군은 전쟁이 확대되자 길림, 요녕, 내몽고, 산서, 하남, 하북, 강소 등 중국 전역에 대량의 위안소를 설치했다.상..

중국 2024.05.16

송경령 묘원

중국근대사를 뒤흔든 송씨 세자매가 있다. 1녀 송애령은 돈을 사랑한 여인, 2녀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한 여인, 3녀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다.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손문(쑨원)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쑹칭링) , 장개석(장졔스)과 결혼한 셋째 송미령의 세 자매를 두고서 흔히 하는 말이다.첫째 송애령은 공상희는  공자의 직계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무부장이 된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조국을 사랑했다는 둘째 송경령(1892~1981년)은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인지 1981년 10월에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명예주석 송경령 동지'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부여했고,  중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송경령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민주..

중국 2024.05.15

만국공묘가 있는 송경령 묘원

상해시 장녕구 송원로 21호 송경령능원에 위치한 만국공묘는 1910년-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어있는 공동묘지였다. 만국공묘로 이장되기 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의 묘는 '징안스루(靜安寺路)'에 있었다. 1966년-197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상하이의 도시 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정안사로'가 철거된 후 한인독립운동가 등 외국인 묘 가운데 일부가 이곳에 이장되었다.이곳에 있던 애국지사의 묘들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점진적으로 우리나라로 봉환되었다.1993년 8월 5일 노백린, 박은식,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등 5기가, 1995년 6월 21일 윤현진, 오영선 2기가 봉환되었다.박은식 선생(1859 ~ 1925)은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중국 2024.05.12

상하이 영안백화점

남경로(南京路)에 위치한 영국인이 세운 영안공사 소유의 이 건물은 1918년 상하이 최초로 문을 연 6층짜리 영안백화점으로 지금도 고전 양식 그대로 건물이 보존되어 있으면서 내부만 리모델링을 통해 백화점 영업을 하고 있다.당시에는 부속시설로 여관, 음식점, 놀이동산을 갖추고 있었다. 이날의 모임은 당시 농림장관이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안창호 선생이 많이 이용하던 여관 '대동여사'가 있었다. 백화점 내 대채루라는 음식점에서 1921년 1월 1일 59명의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신년 모임을 연 뒤  모임을 마치고 옥상에 올라와 기념촬영을 했지만, 촬영했던 장소가 영안백화점 옥상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인 19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KBS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중국 2024.05.11

김구 선생의 피난처, 재청별장

1932년 여름, 일제는 상해-항주 철도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해, 가흥 거리에는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이 김구 선생을 찾기 위해 오갔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에게도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던 김구 선생은 주푸청 며느리(주자루이) 친정 소유인 재청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도 안된 주자루이가 하이옌의 피난처로 안내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7, 8월 염천(炎天)에 친정의 여노비 한명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서남산령 고개를 넘는 모습을 보며 김구 선생은 감동했다.'고 에 적고 있다. 이어서 '우리 국가가 독립하게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으..

중국 2024.05.06

중국 가흥 김구선생 서남호 피난처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은 후 일제는 안창호 선생을 포함한 애국지사 여러 명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고, 상하이의 한국인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김구 선생은 '윤봉길의 홍구공원(현 루쉰공원) 의거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한인애국단이 계획했으며, 애국단 단장은 자신'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김구 선생은 자신에게 내걸린 현상금이 20만 위안에서 60만 위안(현 가치로 200억 원)으로 높아지고감시망과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중국인과 밀정의 일제에게 신고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강성 가흥(현 저장성 자싱)으로 피신한다.김구 선생이 피신한 서남호 호수에 면한 매만구 76호는 주푸청 수양아들 별채였다.김구 선생은 뱃사공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하고 선상생활을 하면서 중국인으로 행세하였다.이름도 '장진구', '..

중국 2024.05.05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해 3·1 운동이 일어났다.한반도 전체에서 온 국민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운동을 일제는 총칼로 탄압을 가했다.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만세 운동을 이어가면서 한민족을 하나로 결집시켜 이끌어갈 정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 결과 한성(서울)과 연해주, 상하이 등에 정부가 들어섰다.이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정부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당시 임시 정부가 자리 잡은 곳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로,  조계지는 프랑스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하기 유리한 곳이었다.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한’, 국민의 나라라는 뜻에서 ‘민국’ 이라고 했다.행정부에 해당하는 임시..

중국 2024.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