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창덕궁 11

창덕궁 반도지 관람정

존덕정을 지나면 한반도 모양을 한 반도지에 관람정이 있다. 관람정은 창덕궁의 후원에서 가장 잘 정돈된 곳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관람정이나 반도지에 관한 기록은 1903년 이전에는 없었다고 하여 그 이후에나 생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람정’의 뜻대로 이곳에서 보여지는 연못의 모습은 아름답다. 관람정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선자정(扇子亭), 바로 부채꼴 모양이다. 반도지 쪽으로 기둥이 4개가 있고, 현관 쪽으로 기둥이 2개 있어 부채를 쫙 편 모양이다. 이러한 형태는 관람정이 연못에 떠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지붕은 홑처마에 단층으로 우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도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형태이다. 반도지를 거꾸로 된 한반도라고 하지만, 임금의 동선인 존덕정에서 바라보면 바로된 ..

창덕궁 존덕정

부용지를 지나면 애련지가 보인다. ‘애련지(愛蓮池)’는 연꽃을 좋아하던 숙종이 자주 찾은 연못이다. 조선시대 연꽃은 더러움에도 오염되지 않는 군자의 덕을 나타내 선비들이 특히 좋아하던 꽃이다. 애련지에는 존덕정(尊德亭)이 있다. 학문을 숭상한 임금인 정조는 존덕정은 자주 들렀다고 한다. 존덕정은 겹지붕에, 겹기둥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본 건물을 세우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 개로 되어있다. 바깥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세워서 이채롭다. (사진에서 보면 안 기둥은 한 개의 큰 기둥으로 되어있고 바깥 기둥은 가는 세 기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옥에서 중첩된 지붕을 찾아 볼 수는 있다. 궁궐, 사찰, 그리고 불사의..

창덕궁 낙선재

최근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 역사적인 논쟁이 뜨겁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만나게 된다. 엄상궁은 1897년 은(垠)을 생산한다. 원래 후궁의 아들이라 적손이 될 수 없었지만, 손이 귀한 조선왕조이다 보니 적손이라는 의미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엄상궁도 왕자를 생산한 덕분에 정1품의 빈이 되었다. 영친왕이 11세 되던 1907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실의에 잠긴 고종을 위로한 이는 소주방 나인 출신의 복녕당 양씨,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고종은 딸을 얻으니, 이가 곧 덕혜옹주이다. 고종의 덕혜에 대한 사랑은 한없었다. 5세 되던 해에는 준명당에 유치원을 세우고, 동년배 5-6명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

창덕궁 대조전

임금의 정전이 인정전이고, 편전이 선정전이라면,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은 대조전이다. 대조전에서는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3년 여동안 순조의 양위를 받아 정치를 했던 효명세자(뒤에 익종으로 추존)가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으나, 임진왜란과 그 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목재들을 창덕궁으로 옮겨 새로 짓고, ‘대조전’으로 불리며 창덕궁의 내전 구실을 하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신축과 개축의 과정을 거치며 대조전 자체와 주변 건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조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36칸의 큰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창덕궁 선정전

인정전을 지나 동행각을 지나 문을 통과하면 보물 제 814호 선정전(宣政殿)이 있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다.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이 국정을 논하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나랏일을 의논하고(상참:常參),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경연:經筵) 곳이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관리는 3품 이상의 당상관 이상이다. 임금이 상참과 경연을 하는 중요한 장소인지라 강화에서 육연(六然)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인 청색유리기와로 만들어졌다. 선정전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선정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이다. 청지와집으로 지붕은 팔작 지붕이다. 용마루 좌우 끝에는 장식의 부속 기와인 ‘취두’가 설치되었다. ..

창덕궁 인정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경복궁의 박석을 생각한다. 창덕궁의 박석은 경복궁의 자연스러움만은 못하지만, 박석 사이로 흐르는 물은 아름답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언제나 햇볕이 쨍쨍, 아쉬움이 크다. 품계석 사이에는 임금이 드나드는 어도가 박석보다 높게 나있다. 창덕궁 박석과 품계석 박석 사이로 난 잔디는 품계석 뒤로 서있던 관리들에게는 아주 좋은 쉼터이다. 왜냐하면 뜨거운 햇볕과 돌, 거기에 검은 색 가죽신은 발을 더욱 따스하게 했다. 박석 사이의 잔디는 뜨거움을 해소시키는 청량제라고나 할까? '궁궐(宮闕)'은 내전을 뜻하는 '궁'과 외전을 뜻하는 '궐'로 구분한다. 내전은 임금과 그 가족과 권속들이 살림하는 구역이며, 외전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보는 곳이..

창덕궁 돈화문과 진선문

창덕궁은 태종이 창건한 조선의 제 2궁이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이 불타자, 경복궁 자리가 불길하다고 하여 광해군이 창덕궁을 정비하고 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때 불타버린 것을 20여 년 후에 다시 복원하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270여년간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 다른 궁궐의 문이 삼문(三門)인 것에 비하여, 돈화문은 오문(五門)이다.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임금이 되었지만, 정도전의 요동 정벌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바로 명나라의 황제가 사는 궁궐인 자금성에서나 볼 수 있는 오문을 만든 것은 자주 국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은 정도전의 영향일 것..

창덕궁의 효명세자와 인연이 있는 전각들

오늘도 '구르미 드린 달빛'의 주인공 효명세자와 관련있는 전각을 찾아본다. 먼저 창덕궁의 희정당을 들 수 있다. 희정당은 연산군 때 불에 타서 다시 지으면서 숭문당을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효명세자는 이곳에서 조선 후기 개화론자이자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만나 개혁의 청사진을 계획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7년 불에 탄 것을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이건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다. 희정당의 모습 불로문을 지나 연못을 만난다. 이곳이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전각을 짓는다. 이 전각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개혁의 굼을 펼치기 위한 전각이기도 하다. 연경당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 곧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리는 곳에 들어가는 문이다. 장락문을 지나면 두 개의 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