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창덕궁

창덕궁 낙선재

윤의사 2016. 10. 9. 16:55

최근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

역사적인 논쟁이 뜨겁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만나게 된다.

엄상궁은 1897년 은(垠)을 생산한다.

원래 후궁의 아들이라 적손이 될 수 없었지만,

손이 귀한 조선왕조이다 보니 적손이라는 의미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엄상궁도 왕자를 생산한 덕분에 정1품의 빈이 되었다.

영친왕이 11세 되던 1907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실의에 잠긴 고종을 위로한 이는 소주방 나인 출신의 복녕당 양씨,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고종은 딸을 얻으니, 이가 곧 덕혜옹주이다.

고종의 덕혜에 대한 사랑은 한없었다.

5세 되던 해에는 준명당에 유치원을 세우고,

동년배 5-6명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승하한 뒤 3년상이 지난 1921년,

일본은 덕혜옹주를 조선 왕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서 교육을 시켰다.

일본으로 간 덕혜옹주는 1931년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을 하였다.

일본의 정략에 의한 혼인이었다.

덕혜는 얼마 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딸 정혜를 낳았다.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로 조현병 증세가 나타나고,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백작의 지위를 잃은 소 다케유키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영친왕의 동의하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1956년에는 딸 정혜마저 실종되었다가 사망하자 더욱 어려움에 빠지며

자신이 살던 창덕궁을 그리게 되었다.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소식을 듣고 귀국 운동을 펼쳤으나,

조선 왕실에 대한 부담감으로 이승만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1962년 박정희 정부 때 51세의 나이로 귀국을 하였고,

2년 뒤 영친왕도 귀국하면서 낙선재에 함께 머물렀다.

영친왕은 1970년에, 덕혜옹주는 1989년에,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여사는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9일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원래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이 명헌왕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경빈이 거처할 곳으로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세웠다.

낙선재(樂善齋)는 군자의 덕목 중 으뜸인 ‘선을 즐기라.’는 의미이며,

헌종의 사랑채라고 할 수 있다.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정면 6칸,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고 있다.

낙선재의 특징은 다른 궁궐 전각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고전미가 넘친다고 할까?

낙선재의 담벽은 거북등모양의 육각형 모양으로

품위있는 왕가의 모습을 나타내는 조형미가 돋보인다.

 

 

 

낙선재의 외부 모습

 

 

낙선재의 모습

 

 

낙선재의 독특한 원형 문살

 

 

석복헌의 모습

 

 

수강재의 모습

 

 

거북등 모양의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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