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 213

송학선 의사

송학선 의사는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송성근과 부인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 1학년 때인 13세에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7살 이후부터 다시 가족과 살면서 인쇄소와 농구회사에 취직하여 가족과 같이 살았으나, 직장에서의 차별대우로 반일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송학선 의사는 어릴적 하얼빈 의거를 행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면서 조선 총독 암살 의거로 반일의식을 나타내고 국민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1926년 3월에 경성사진관에 미장일을 하기 위해 찾았다가 부엌에 떨어진 양식 칼을 발견하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사이토 일본총독을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

매헌윤봉길의사

4월 27일부터 4월 30일까지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2주년 행사단과 함께 중국 상하이를 갔다.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특히 시게미쓰 공사는 1945년 미국  미주리함에서 외무장관으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이다.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중국 100만..

송도삼절

흔히 송도삼절이라고 하면 황진이가 말한 자신과 서경덕, 그리고 박연폭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조부터 인조 연간에 사람들은 송도삼절을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한호의 글씨를 일컬었다. 최립(崔岦)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은 가난하였다. 자는 입지(立之)이며, 호는 간이(簡易)이다. 간이는 간이, 변역, 불역으로 구분하는 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간단하고 평이해 쉽게 이해할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명종 10 년(1555) 17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6년 뒤인 명종 16 년(1561) 문과 시험에 장원 급제한 이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조선중기 외교문서를 작성해 선조 10년(157..

쇼생크 탈출을 시도했던 폐세자 이지

광해군의 장남 이지(李祬)는 선조 31년(1598)에 태어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박씨는 광해군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다 인조반정 때 처형된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1623년 3월 14일 인조 반정이 일어나 이지는 폐세자로 강등되었고, 같은 해 3월 23일 아버지 광해군 및 가족들과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빠른 물살이 이는 강화해협을 건너는 이지의 마음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이다. 이지는 배 안에서 시를 썼다. 塵寰飜覆似狂瀾(진환번복사광란) 何必憂愁心自閒(하필우수심자한) 二十六年眞一夢(이십육년진일몽) 好須歸去白雲間(호수귀거백운간) 속세의 흥망성쇠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

천연두를 치료한 왕족 이헌길

어느 날 한 부인이 와서 남편의 병세를 말하며 애원했다. 이헌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의 병은 너무 위중하오. 마지막으로 써 볼 약이 있긴 한데, 그대가 해낼 수 있을지...” 부인의 애원에도 처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부인은 죽어가는 남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독약과 술을 사서 집으로 갔다. 남편의 고통을 줄이고 죽음을 맞게 하기위해 그릇에 독약을 술에 타서 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부인은 차마 남편에게 줄 수 없어, 문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다시 마루로 돌아오니 울다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릇이 비어 있었다. 남편이 물인 줄 알고 마셔버린 것이다. 부인은 다시 이헌길에게 달려가 남편이 독을 탄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허 참, 내가 알려 줄려고 한 처방이었는데 부인이 하지 못할 것 같..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

1885년 9월 30일 박서양은 박성춘(백정이기에 이름이 없다가, 백정의 신분 해방을 맞아 ‘봄이 왔다’는 뜻의 성춘으로 지음)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가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일 때 아들인 박봉출이 다니던 교회 목사인 무어의 소개로 왕의 의사인 캐나다 선교사이자 서양 의사인 에비슨에게 치료받아 완쾌하였다.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도 못받던 시절에 박가는 큰 감동을 받으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백정들처럼 갓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무어 교회를 백정교회라 불렸다. 에비슨이 1895년 유행한 전염병의 방역 책임자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고종은 내부대신 유길준을 통해 사의를 나타냈다. 에비슨은 유길준에게 백정도 상투에 갓을 쓸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사슴'의 작가,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이름은 노기선이나 홍역으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면서 노천명으로 개명했다. 1918년 부친의 죽음과 함께 서울로 이사온 후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언니마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기숙사에서 고독한 시간을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데 보냈다. 1932년 6월에 발간된 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 1937년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잡지 『여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을 출간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 「앵화원(櫻花園)」을 무대에 올렸을 때 만난 보성..

오늘은 나도향 타계

작가 나도향(羅稻香:1902-1926)은 한국 근대 문단의 천재 작가로 평가받는다. 나도향은 1902년 3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56번지에서 양의사인 아버지 나성연과 어머니 김성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인데 한의사인 할아버지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으로 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나도향 본인이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을 싫어했기에 자신이 직접 지은 '벼꽃 향기'라는 뜻으로 '도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는 잠시 떠돌다가 사라지는 향기처럼 나도향이 일찍 죽었다고 생각해 이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집안의 기대에 따라 나도향이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18년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학에 뜻이 있던 ..

청백리 박이창

청백리로 유명한 박이창의 본관은 상주이며, 할아버지는 판사재시사를 지낸 박문로이다. 태조 3년(1394)에 대제학을 지낸 아버지 박안신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숙주는 처조카이다. 태종14년(141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종 17년(1417)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면서 세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전라도에 감찰로 나가 조희정·양맹지 등이 나라의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세종 11년(1429) 함길도 경차관으로 함길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 소홀한 수령관들을 조사하여 관직을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종 16년(1434) 내자소윤이 되어 경기·황해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관리들의 실태를 살폈다. 세종 25년(..

마라톤 영웅 아베베가 6.25 전쟁 참여

에티오피아의 세계적 마라톤 선수인 아베베는 로마 올림픽과 도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12분 11초 2의 놀라운 신기록으로 올림픽 2연패를 이룬 위대한 마라토너이다. 특히 맨발로 달려 우승하였기에 '맨발의 왕자'로 불렸다. 대기록의 사나이 아베베가 6.25 전쟁에 에티오피아 군인의 한 사람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참전을 결정한 사람은 셀라시에 황제이다. 그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아프리카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흑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것을 반대해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탈리아 침략에 패하여 망명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립을 되찾아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되었으며,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의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선발한 병사로 대대를 편성해, '가그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