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장진홍 의사

윤의사 2024. 10. 28. 19:57

장진홍 의사는 1895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현재 구미시 인동동) 옥계동 문림마을에서 태어나, 1907년 인명학교(현 구미 인동초등) 학생 때 장지필 선생을 만나 항일의식을 키웠다. 191612월 고향 출신 이내성의 권유로 비밀 독립운동단체 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민종식과 이강년 휘하의 의병 출신, 영남 유림 등으로 조직된 광복단은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단원 보강의 임무를 하면서 일본에 무력항쟁을 한 조직이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장진홍의사는 1918년 만주로 간 연해주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 명을 모집해 군사훈련으로 독립군을 양성해 항일운동을 펼치려 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해서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학살, 방화, 고문 등의 한국인 탄압 상황을 전국을 다니며 조사하여 19197월 인천에 들어온 미국 군함에 근무하는 경북 출신 군무원인 김상철에게 주면서 번역해 세계 각국에 전할 것을 요청하였다.

장진홍 의사는 신문지국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펼쳐오다가 일본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호리기타 미사키(掘切茂三郞)에게 폭탄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1927101일 자신이 만든 폭탄을 가지고 칠곡과 선산의 경계인 휘안고개에서 폭탄 성능 시험을 마치고 대구 덕흥여관에 투숙하며, 식민통치의 중심 기관이었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경북 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 4곳을 폭파하기 위해 준비했다.

19271018일 선물용 벌꿀상자로 위장한 폭탄 상자 4개를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주며 4곳으로 배달토록 부탁했다. 첫 번째 배달 장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58번지에 있는 현 케이비 하나 스테이 건물터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연쇄 폭발되어 대구경찰서 순사와 은행원 등에 중경상을 입히고 건물을 파손시켰다.

이후 장진홍 의사는 검거망을 피해 일본 오사카에 은신하던 중 19292월 붙잡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721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미수, 살인 예비라는 죄 명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집행일인 81일 전날인 1930731일 대구형무소에서 장진홍 의사는 "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그날 밤 11시경 스스로 자결해 순국하였다.

일본 경찰은 당황하면서 서둘러 뇌내출혈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였고, 의사의 유해가 감옥을 나올 때 수감자 1천여 명이 조선독립 만세’, ‘장진홍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일제는 한국인이 모여 항일만세시위를 할 것이 두려워 친족이나 동지들조차 입회하지 못한 채 칠곡군 석적읍 남율리의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묘소를 마련했다.

장진홍 의사는 1962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사진:칠곡군청)

장진홍 의사
장진홍 의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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