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되었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크게 활약했던 사람이 하공진, 양규, 강감찬 장군이다.
하공진(河拱辰)은 진주 출생으로, 성종 때에 압록강 구당사가 되었다.
목종 때에는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왕을 가까이서 모시었다.
강조는 목종 12년(1009)에 김치양이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하공진은 이에 반대하여 원도에 귀양을 갔다가 풀려 아왔다.
강조와 현종이 거란을 배척하며 친송정책을 이어 나가자, 거란은 성종(아율문수노)이 현종 1년(1010)에 2차로
침입해 의주가도(義州街道)의 흥화진에서 양규 등의 완강히 저항하자 진로를 바꾸어 통주 부근으로 우회해
강조와 맞붙어 강조를 죽였다. 이어서 거란군은 곽산, 안주, 숙주등이 다 함락되고 오직 서경만이 항거하고 있었다.
이 때 왕은 강감찬의 제안으로 후비와 궁녀를 이끌고 광주로 피난하였다.
개경이 비자 거란은 서경을 우회하여 쉽게 개경을 점령하고 왕의 뒤를 추격하였다.
개경의 점령과 거란의 남하 소식은 현종을 당황시켰다.
이 때 하공진이 군사를 독려하다가 왕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일이 이미 급하오니 신이 나가 강화를 가장하여 거란군의 추격을 지체시킬 것이오니 폐하께옵서는 빨리 남하하소서.”
한 때는 하공진을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현종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현종은 불리한 전세를 전환하려고 하공진의 청을 들어주었다.
하공진은 거란군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큰 백마에 은으로 꾸민 안장 위에 타고 금투구에 은갑을 입힌 기병 2십 명과 함께 한강에 도착해 거란 장수와 인사를 나누었다.
“멀리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하공진이 기골이 장대하면서 기상이 늠름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니 조금도 눌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 거동을 본 거란 장수는 속으로 자신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온 고려 장수로 착각해 소리쳤다.
“우리 황제께서 이미 당신의 서울까지 점령하였으니, 그대의 국왕이 말 앞에 나와 맞아야 할 것이네. 어찌 오지 않고 그대만 왔는가?”
이에 하공진은 껄걸 웃으며 말했다.
“양국이 전쟁하여 아직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때에 한낮 장수로서 외람되이 남의 국왕을 들어 말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그러자 거린 장수는 말끝을 흐리며,
“그대는 어찌 왔는고?”
라고 묻자,
“내가 그대의 주장(主將)을 만나보고 이해득실을 말하려고 왔으니, 그대들의 대군이 있는대로 가자.”
라고 하공진이 대답하였다.
거란 장수가 하공진을 데리고 거란왕에게 데리고 가니, 거란 왕은 다시 고려 국왕의 소재를 물었다.
이에 하공진은 지금 소재를 알 수가 없으며, 강남은 워낙 멀어 추격하기가 어려우니 돌아가라고 말다.
성종(아율문수노)은 하공진을 인질로 하여 거란군은 물러 가고,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거란에 인질로 간 하공진은 겉으로는 성종(아율문수노) 에게 충성을 다하는체 하면서 고려로 탈출의 기회를 엿보며 준마(駿馬)를 기르고 있었다. 이에 하공진의 뜻을 안 성종(아율문수노) 은 그의 고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부러워 자신의 신하로 삼고자 하였다.
“나는 고려인이다.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아시고려인(我是高麗人) 불감유이심(不敢有二心)>”
하공진은 성종(아율문수노)에게 욕을 하며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이에 거란왕은 하공진을 극형에 처하였다.
죽음을 무릎쓰고 나라를 구한 하공진의 충정과, 협박과 회유속에서도 한국인임을 내세운 하공진의 기세는 오늘날 우리가 흠모하지 않을 수가 없다.(사진:진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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