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윤의사 2020. 1. 15. 16:43

양화진은 원래 군인들이 주둔하던 곳이예요. 한강으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이 위해 영조 때 양화진을 설치하여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지요.


양화진 옛터를 장대석으로 만들어 표시해 놓았어요

 

그런데 병인박해 때 8000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하였지요. 순교자들의 머리가 참수되어 이곳을 절두산(截頭山)으로 불리웠어요. 아픔이 있는 이곳에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우리나라를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원이 있어요.

1890728일에 미국 장로교 의료 선교사인 J.W.헤론이 세상을 떠나자 미국 공사가 양화진을 외국인 묘원으로 만들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외국인 묘원으로 자리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남아공, 미국, 스웨덴,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6개국의 417명의 선교사가 잠들어 계세요.


양화진선교사묘원표지석
 

배설(Ernest Thomas Bethell:18721909)은 영국 출신의 기자로 1904년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같은 해 7월에 양기탁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논설을 많이 게재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1904년에는 우리 나라 국토를 자기 마음대로 빼앗겠다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알리며 비판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성을 알렸어요. 일본인이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려고 하자, 신문사 정면에 일인불가입(日人不可入)’이라는 간판을 걸어 일본인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을 영어로 번역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도 하였지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되자, 이를 보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어요. 그리고 같은 해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대한매일신보가 그 중심에서 이를 추진하였어요.

이에 일본은 한국인의 항일의식 고취에 배설이 관련되었다면서 영국에 처벌을 요구했어요. 도한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3주간 금고형도 살았지만 결국 무죄가 되었어요. 다시 신문을 발행하려다가 19095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배설 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은 한국 이름이 허할보(許轄甫)로 할 정도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한 외국인이예요. 23세에 우리나라에 와서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어요. 헐버트는 한국을 사랑하면서 한글이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하였어요. 그래서 펴낸 책이 사민필지한국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어요.


민필지(배재학당박물관)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던 날은 고종황제를 옆에서 지켰으며,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가기도 했어요.

그가 길러낸 제자 중에는 주시경과 같은 한글학자와 이승만과 같은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도 있었어요.

1919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일본의 잔인함을 고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할 것을 호소했어요.

1949년 대한민국이 독립되고 정부가 수립되자 42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일주일만에 세상을 더났어요. 유언으로 미국의 웨스터민스터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김동진선생이 저술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 의하면 19497월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헐버트 박사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을 엿볼 수 있으며, 독립을 자신하는 모습이었어요.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우수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한편 “3·1운동으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fealty)과 비폭력 만세 항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강조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한국인과 한국을 더 잘 평가하면서 긍지를 가진 외국인이라고 하겠지요.


헐버트 묘

 

H. D. 아펜젤러(H. D. Appenzeller:1889~1953)

아버지인 헨리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외국인이예요. 아버지는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와 정동교회를 설립하고 그 옆에 배재학당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여 근대화를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어요. 하지만 1902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려다 어청도 부근에서 배가 침몰하여 여학생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났어요. 아직도 그의 시신을 찾지는 못해 안타까운 마음 뿐이예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 아펜젤러는 1920년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을 섰어요. 그러던 중 백혈구 부족이라는 질병으로 미국에 갔다가 1953년 세상을 떠났어요. 유언으로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하여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게 되었지요.

    


H. D. 아펜젤러의 묘와 아버지 헨리 아펜젤러가 한국 땅을 밟은 뒤 남긴

기도문이 비석으로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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