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52

쇼생크 탈출을 시도했던 폐세자 이지

광해군의 장남 이지(李祬)는 선조 31년(1598)에 태어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박씨는 광해군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다 인조반정 때 처형된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1623년 3월 14일 인조 반정이 일어나 이지는 폐세자로 강등되었고, 같은 해 3월 23일 아버지 광해군 및 가족들과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빠른 물살이 이는 강화해협을 건너는 이지의 마음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이다. 이지는 배 안에서 시를 썼다. 塵寰飜覆似狂瀾(진환번복사광란) 何必憂愁心自閒(하필우수심자한) 二十六年眞一夢(이십육년진일몽) 好須歸去白雲間(호수귀거백운간) 속세의 흥망성쇠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

1885년 9월 30일 박서양은 박성춘(백정이기에 이름이 없다가, 백정의 신분 해방을 맞아 ‘봄이 왔다’는 뜻의 성춘으로 지음)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가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일 때 아들인 박봉출이 다니던 교회 목사인 무어의 소개로 왕의 의사인 캐나다 선교사이자 서양 의사인 에비슨에게 치료받아 완쾌하였다.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도 못받던 시절에 박가는 큰 감동을 받으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백정들처럼 갓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무어 교회를 백정교회라 불렸다. 에비슨이 1895년 유행한 전염병의 방역 책임자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고종은 내부대신 유길준을 통해 사의를 나타냈다. 에비슨은 유길준에게 백정도 상투에 갓을 쓸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사슴'의 작가,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이름은 노기선이나 홍역으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면서 노천명으로 개명했다. 1918년 부친의 죽음과 함께 서울로 이사온 후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언니마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기숙사에서 고독한 시간을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데 보냈다. 1932년 6월에 발간된 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 1937년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잡지 『여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을 출간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 「앵화원(櫻花園)」을 무대에 올렸을 때 만난 보성..

오늘은 나도향 타계

작가 나도향(羅稻香:1902-1926)은 한국 근대 문단의 천재 작가로 평가받는다. 나도향은 1902년 3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56번지에서 양의사인 아버지 나성연과 어머니 김성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인데 한의사인 할아버지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으로 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나도향 본인이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을 싫어했기에 자신이 직접 지은 '벼꽃 향기'라는 뜻으로 '도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는 잠시 떠돌다가 사라지는 향기처럼 나도향이 일찍 죽었다고 생각해 이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집안의 기대에 따라 나도향이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18년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학에 뜻이 있던 ..

청백리 박이창

청백리로 유명한 박이창의 본관은 상주이며, 할아버지는 판사재시사를 지낸 박문로이다. 태조 3년(1394)에 대제학을 지낸 아버지 박안신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숙주는 처조카이다. 태종14년(141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종 17년(1417)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면서 세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전라도에 감찰로 나가 조희정·양맹지 등이 나라의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세종 11년(1429) 함길도 경차관으로 함길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 소홀한 수령관들을 조사하여 관직을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종 16년(1434) 내자소윤이 되어 경기·황해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관리들의 실태를 살폈다. 세종 25년(..

양평의 노비 시인, 정초부

동호(東湖) 東湖春水碧於藍 白鳥分明見兩三 柔櫓一聲飛去盡 夕陽山色滿空潭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을 채우나니 이 시는 정초부(鄭樵夫)라는 노비 시인이 지은 시이다. 초부는 나무꾼이라는 뜻이기에, ‘정씨 나무꾼’으로 조선시대 최하층 신분이라 하겠다. 그는 조선 정조 때 사람으로 지금의 양평 지역에서 여씨 집안의 노비였다. 한시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 등 10개가 넘는 규칙과 문학성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해야만 한다. 여춘영 부친은 어깨 너머로 들은 한시를 한번 듣고 암송하는 정초부의 천재성에 감탄해 글을 가르쳤으며, 여춘영은 그와 함께 공부하면서 ..

어머니의 자식 사랑

양희수가 전라도 영광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가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배가 고팠으나 주위에는 주막이나 민가도 없었다. 민가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다 허름한 집을 찾았다. 양희수가 인기척을 하니 소녀가 나왔다. "내가 시장해서 그런데 밥 한끼 먹을 수 있겠소?"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기꺼이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 내왔다. 소녀의 정성에 감동한 양희수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이것은 고마움으로 내가 그대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네." 하면서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을 주었다. `채단'이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이다.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급히 안방으로 가서 보자기를 가져와 "청선과 홍선을 이 보자기에 주시지요." 라면서 펼쳤다. "아니 웬 보자기를..." "폐백에 바치는 ..

소설가 이태준

1904년 12월 4일 철원에서 출생한 이태준의 호는 상허(常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으로 휘문고등학교에서 이병기의 지도로 문학을 배운 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에서 공부하였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다가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33년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등과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0년말에는 의 소설 추천위원으로 임옥인 등을 배출하였다. 8·15해방 후 임화·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며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6·25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5년 소련파와 함께 숙청되었다.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고 전한다..

한글날에 기리는 분, 최현배

오늘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일본의 지배하에서 지키기 위해 애슨 최현배 선생을 기려본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한글 학자이자 교육가이다. 일제 시대에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최현배는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한글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한글 교과서를 보급하는 한편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한글 교육에 힘썼다. 1933년에는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고, 을 지어 한글이 국어학의 한 갈래가 되도록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조국이 해방되면서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

광주에 머물며 한센병을 치료한 우일선

윌슨(한국 이름은 우일선:1880~1963) 선교사는 1908년 놀란(J. W. Nolan) 선교사가 설립한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의 제 2대 원장이 되면서 한국에 왔다. 1948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40년 동안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우일선 선교사가 치료에 헌신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제중로 47번길 20(양림동)에는 우일선 선교사 집이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선교사 집은 1920년대 지어진 집으로 광주의 현존하는 장 오래된 양식 건물이다. 양림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2층 벽돌집이다. 광주 사람들은 선교사의 집이 양식으로 지어졌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