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선조 36년(1603)에 태어났다.
선조가 52세에 난 공주였기에 사랑을 독차지했다.
석봉 한호,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등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서예가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서예에 능했다.
서예에 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광해군에 의해 동생인 영창대군이 증살되고,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면서
모든 시름을 잊기 위해 서예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인조 반정 후 공주로 복권된 정명공주는 3살 연하인 노론 명문가 홍주원과 혼인해 7남1녀를 두었다.
원래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했으나, 정명공주는 200간이 넘었다니....
그런데 아들과 며느리, 심지어 손자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인조의 의심병은 고모인 정명공주에게도 이어졌다.
여러 차례의 의심과 갈등이 있었지만 정명공주는 그때마다 자신을 낮추며 높은 담장 아래에서 오로지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데 힘썼다.
그녀의 인내와 생존,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생각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보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정명공주가 강화도로 피신을 가면서 많은 양의 금은 보화를 배에 실었다.
전쟁 중이기에 금은 보화는 그 어느 것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피해 피난가는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러자 정명공주는 자신의 금은 보화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웠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정명공주의 후손은 번창할 것이다."
라고 했다.
인조의 죽음 이후 효종과 현종, 숙종은 그녀를 행복하게 했으며, 조선시대 공주 중 가장 장수해 숙종 13년(1685)에
세상을 떠났다. 후손 중 6대손인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국영, 그리고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가 있다.
막내아들인 홍만회가 보관 중이던 '華政'이라는 글씨는 석봉체로 한 글자의 크기가 71~75㎝에 달한다. 정명공주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글씨로 간송 전형필은 1937년 3월 13일 ‘일기대장’에 “위창 댁에 있는 ‘화정’, 단원의 작품을 230원에 지불하여 가지고 오다”라고 적었다. ‘아름다운 정치’나 ‘빛나는 다스림’으로 풀이되는 화정처럼 요즘 어울리는 말인 듯 하다.
정명공주와 관련된 드라마는 2015년에 '화정'으로 방영되었다.(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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