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때 사상가, 유학자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동방의 주자’로 불렸다.
이황은 사립 학교를 세워 제자를 기르는 데도 힘썼으며, 그의 학설은 일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은 책으로는 <퇴계 전서> 등이 있고, 시조로는 ‘도산십이곡’이 있다.
어릴 때 이름은 서흥, 자는 경호,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시인, 시호는 문순이다.
이황은 일찍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식들을 글방에 보내고, 늘 몸가짐과 말을 삼가도록 가르쳤다.
이황은 혼자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하기를 즐겼는데,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공부하다 건강을 해쳐 평생 잔병치레가 심했다고 한다.
비교적 늦게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당파 싸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맡은 일에 성실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높은 벼슬자리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였다.
도산 서원을 세워 올바른 교육에 힘쓰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나라에 건의하여,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는 이름과 전답과 많은 책이 내려지게 하였다. 소수 서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 대학이었고, 그 뒤로 각지에 서원이 세워져 유학과 교육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황 자신도 50세에 가까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한서암과 계상 서당 및 도산 서당을 세우고, 성리학 연구와 책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주자전서>를 간추려 <주자서절요>를 짓고, <계몽전의>라는 책을 엮었다. 이 밖에 <성학십도>라는 글을 통해, 유학의 근본이 되는 사상과 실천 방법을 독창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이황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해주기보다는 인격을 높이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고,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언제나 공손하게 예절을 지켰다.
조선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다
이황은 이언적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의 철학을 독창적인 조선의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글을 배우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며,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학문을 하고, 인생을 사는 기본 태도로서 ‘공경’하는 마음을 지닐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는 노학자로서 젊은 선비인 기대승과 8년에 걸쳐 학문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토론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황의 학풍은 유성룡, 김성일 등에게 이어져 조선 주리 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죽기 전 아들에게 나라에서 조의금이나 장례용품 주면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다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1570년) 12월 1일을 기사를 보면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 누차 상소하여 나이가 들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병이 들었는데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가 틀림없이 관례에 따라 예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할 것인데, 너는 모름지기 내가 죽으며 남긴 뜻이라 말하고 상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라. 그리고 묘도(墓道)에도 비갈(碑碣,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세우지 말라.‘ 하였다.(가운데 줄임) 그로부터 며칠 뒤 죽었는데 준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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