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채제공 뇌문비

윤의사 2014. 11. 4. 08:40

  채제공은 정조가 꿈꿔왔던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일을 앞장서 추진해 나갔다. 그는 1789년 현륭원 총리사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서 수원 화산 아래 현륭원으로 천봉했고, 이어 원찰인 용주사를 창건했으며 수원부 읍치를 이전했다. 현륭원 조성과 함께 1793년 수원부를 수원유수부로 승격시켜 좌의정으로 있던 채제공을 초대 수원유수로 임명했다. 채제공은 5.9km의 화성을 10년 계획으로 추진했다가, 근로자의 임금 지급과 성과급의 실시, 그리고 거중기 등 각종 기기의 이용을 통하여 33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1799118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한다해 ()’, 마음가짐을 과단성 있게 한다해 ()’이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장례일에 정조는 직접 지은 조문(弔文)인 사제뇌문을 내려주어 각별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제뇌문’, 곧 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여 스스로 죽은 신하의 공을 기리는 글을 적어 보낸 조문 형식의 글로, 이를 비에 새긴 것이 뇌문비이다. 채제공의 뇌문비는 채제공의 묘소 입구 산기슭에서 북서향 방향에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뇌문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으며 비문은 정조 임금의 필체로 보이며 비의 명칭은 허목의 글씨체로 추정하고 있다. 뇌문비는 높이 228, 너비 54, 두께 29크기의 비석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인시청의 소개문에 나온 뇌문비의 해석을 인용하자면 서두에는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라는 칭송의 글이 있다. 또한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는 문장을 통해 채제공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채제공을 일컬어 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의 정을 취한 듯, 열자의 진액인 듯하고, 사마천의 골수 같고, 반고의 힘줄 같다고 격찬하였다. 이어서 정조와 채제공의 친분에 대해 열거하였다. 정조는 경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이 믿었노라라고 하였다. 끝부분에서는 조정에 노성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며 500여 마디의 말로써 뇌문을 지었노라고 자술하였다. 건립 연기는 비문 말미의 기미 삼월 이십육일(己未 三月 二十六日)”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99(정조 23) 3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뇌문비는 채제공이 정조가 추진한 개혁 정책의 상징이면서 정조의 충직한 충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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