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 213

소설가 이태준

1904년 12월 4일 철원에서 출생한 이태준의 호는 상허(常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으로 휘문고등학교에서 이병기의 지도로 문학을 배운 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에서 공부하였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다가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33년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등과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0년말에는 의 소설 추천위원으로 임옥인 등을 배출하였다. 8·15해방 후 임화·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며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6·25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5년 소련파와 함께 숙청되었다.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고 전한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선생

조신성 선생은 1874년 10월 3일 평북 의주에서 조춘택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사업에 실패하여 출가한 아버지와 9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모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16세 때 혼인을 했으나, 아편 중독자인 남편이 가산을 탕진하고 자살하고 시댁의 학대로 가출한 후, 1897년 의주읍교회에서 베어드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조신성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조신성은 1898년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학당과 교원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교편을 잡다가, 190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다성경학교와 요코하마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 귀국한 조신성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이 되어 후진을 양성했다. 학교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한글날에 기리는 분, 최현배

오늘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일본의 지배하에서 지키기 위해 애슨 최현배 선생을 기려본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한글 학자이자 교육가이다. 일제 시대에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최현배는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한글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한글 교과서를 보급하는 한편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한글 교육에 힘썼다. 1933년에는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고, 을 지어 한글이 국어학의 한 갈래가 되도록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조국이 해방되면서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

민족 시인 정지용

정지용 시인은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중국 등지에서 한의학을 배워 한때는 부유했으나, 홍수의 피해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처가 친척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지용은 아버지의 방랑과 실패, 가난으로 인한 불행, 그리고 4대 독자로서 느꼈을 고독으로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 고 회고한 바 있다. 고독과 가난은 정지용을 문학적 상상력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4대 독자인 정지용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감은 불행한 환경의 정지용에게 꿈과 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지용은 17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동인지 『요람(搖籃)』을 만들어 습작을 시작하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정..

여성독립운동가 박자혜선생

박자혜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중인 출신인 아버지 박원순의 딸로 경기도 고양군(오늘날 강북구 수유동)에서 태어났다. 아기나인으로 10여 년동안 궁녀로 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에서 벗어나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고, 사립조산부양성소를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에서 일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 부상 동포들을 치료하면서 울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하였고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여 만세시위와 함께 간호사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 인도로 풀려난 후 북경으로 갔다. 회문대학 의학과(후에 연경대 의예과)에 입학하여 1년을 수학한 후 신채호선생을 만나 혼인하였다. 장자 신수범과 둘..

여성독립운동가 박원경

1901년 8월 19일 황해도 벽성군 도평리에서 출생한 박원경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장으로 있었다.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필사하여 황해도 재령군 각지에 돌렸다. 재령읍 장날인 3월 9일에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3월 3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4월 형을 받고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6일 가출옥한 후 농촌계몽운동과 독립운동 집안을 도왔다. 1983년 세상을 떠났으며,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 동풍신

우리가 어린 학생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유관순 열사를 꼽고 있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만큼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함경북도 명천의 동풍신이다. 동풍신은 1904년 가난한 농민인 동민수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도 3월 15일 화대장터에서 5천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였다. 하가면장 동필한에게 함께 만세시위를 하자고 했으나 거절하면서 헌병분견소로 도망쳤다. 헌병분견소로 따라갔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를 비롯한 5명이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에 동풍신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울다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옷에 묻은 피며 산발된 머리를 보면서 일본 헌병들은 '미친..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영화 '암살'에서 무장독립운동가로 나오는 '안윤옥' 바로 남자현 지사의 재현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의 911번 지방도로를 타다보면 지경마을이 있고, 도로가에 남자현지사 생가지가 있다. 남자현 지사는 고종 9년(1872)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여자 안중근'이라 불리웠다. 남편 김영주가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전사하자, 유복자를 키우면서 시부모를 모셨고, 을사조약 이후 의병으로 활동한 친정아버지를 도와 적 후방 교란과 정보 수집 및 의병을 모았다.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당한 독립군을 간호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일본 요인 암살 및 일본 기관의 폭파 등 무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남자현 지사는 스스로 세 개의 손가락을 잘랐다. 처음에는 독립군 내부에서 분파가 생기..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의사

내일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76년이 되는 날이다. 순국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신 선열들께 감사드리면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안경신의사를 돌아본다. 1920년 8월 3일,안경신의사는 5개월재 된 임신한 몸으로 평남 도청과 평남 경찰부에 폭탄을 던졌다. 1888년 7월 22일, 평남 대동에서 출생한 안경신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0일 동안 감옥에 있었다. 출옥 후 같은 해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쌀 한 가마니에 1원 하던 시절 2400원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에 미국 의원단이 중국..

광주에 머물며 한센병을 치료한 우일선

윌슨(한국 이름은 우일선:1880~1963) 선교사는 1908년 놀란(J. W. Nolan) 선교사가 설립한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의 제 2대 원장이 되면서 한국에 왔다. 1948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40년 동안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우일선 선교사가 치료에 헌신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제중로 47번길 20(양림동)에는 우일선 선교사 집이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선교사 집은 1920년대 지어진 집으로 광주의 현존하는 장 오래된 양식 건물이다. 양림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2층 벽돌집이다. 광주 사람들은 선교사의 집이 양식으로 지어졌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