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신사임당

동해의 푸른 꿈을 안고 태어나다

윤의사 2015. 9. 13. 20:23

오늘도 신명화의 부인인 용인 이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기를 임신한 용인 이씨는 첫째 자식으로 딸을 낳았는데, 이번에도 딸을 낳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부인,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요.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떻습니까? 딸을 낳으면 아들같이 잘 키우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요, 당신이 처갓집에 머무르며 시부모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제 형편에 아들이라도 낳아야지요.”

“원,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그냥 부인이나 아기나 건강하기만 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아들이 있어야 서방님께서 조상님들을 만나도 면목(부끄러워 남을 대할 낯이 없다)이 서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극진한 부인의 정성을 보아서도 조상님들도 어쩌시지 못할 것입니다.”

신명화는 미소를 지으며 용인 이씨를 위로하였다.

신명화의 조상은 신숭겸이다. 신숭겸은 고려 태조 왕건이 상주에서 견훤에게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왕건의 옷으로 갈아입고 견훤을 맞아 싸우다 세상을 떠나면서 왕건을 살려낸 1등 공신이다. 신명화는 신숭겸의 18대 손이었으며, 아버지는 영월군수를 지낸 신숙권이었다.

신숙권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매죽루’라는 누각을 지었다.

신숙권이 지은 매죽루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수양대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단종임금(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단종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은 200여 년 후인 숙종 7년<1681>에 대군으로 복위되었으며, 숙종 24년<1698>에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이다.) 이 사육신(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복위시키려다가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의 충신으로 성삼문, 이개, 하위지,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를 가르킨다)의 단종 복위 운동으로 영월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단종임금은 영월에 와서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와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죽루에 자주 올라갔다. 단종임금이 매죽루에 오를 때마다 두견새가 단종임금의 마음을 아는지 슬피 울었다. 그래서 단종임금은 두 편의 시를 지었다.

 

-자규사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자규시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외로운 그림자 산 중에 홀로 섰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구나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이는고

 

이처럼 좋은 집안에서 자란 신명화는 성격이 곧고 낙천적이어서 딸, 아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원래 신명화가 살던 때는 연산왕이 다스리던 어지러운 시기였기에 이 곳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학문에 힘쓰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신명화의 부인인 용인 이씨는 항상 걱정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