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신사임당

동해의 푸른 뜻을 품고 태어나다 2

윤의사 2015. 9. 17. 08:21

용인이씨의 아버지인 이사온은 병마절도사(조선시대에 8도에 설치한 병영의 우두머리로 종삼품의 무관 벼슬)를 지낸 이익달의 아들이었으나, 참판을 지낸 장인 최응현이 아들은 없고 딸 밖에 없어 최참판 집에 머물고 있었다.

딸이 서울에 사는 신명화와 결혼을 하자 최참판댁을 나와 이곳 북평에 온 지도 어느 덧 1년이 되었다. 이사온도 장인을 닮았는지 딸이 하나밖에 없어 사위인 신명화와 함께 지내며 학문에 힘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임금이었던 연산왕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정치가 혼란스러웠기에 벼슬할 뜻을 접어두고 이곳 북평에서 학문에 힘썼던 것이다.

원래 신명화와 용인 이씨는 시부모님이 살고 있는 서울에 있었다. 그런데 강릉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니 시부모님께 양해를 얻어 빨리 내려 오시기 바랍니다.

 

친정어머니인 최씨 부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었다. 용인 이씨는 조심스럽게 신명화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

용인 이씨가 신명화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신명화는 답답하다는 듯이 용인이씨를 재촉하였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시오?”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하셔서 강릉으로 가서 살면 어떨지요?”

신명화도 용인 이씨의 말을 듣자 고민을 하였다. 장모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용인 이씨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는 사위가 처갓집의 장인과 장모를 모시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아직 성리학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신명화는 결론을 내렸다.

부인의 뜻대로 하시오. 장모님도 곧 나의 부모님이 아니겠소? 대신 나는 서울에 머물며 부모님을 모시면서 때때로 강릉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보러 가겠소이다.”

용인 이씨는 신명화가 자신의 뜻을 이해해주자 고마웠다. 용인 이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소녀가 부모님을 모시고자 하는 욕심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날,

신명화는 용인 이씨가 마음 편히 강릉으로 내려가도록 배려(여러 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씀)를 해주었다.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시니 고맙습니다.”

부인은 무슨 말씀을 하시오. 멀리 떠나는 부인이 고생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녀가 없더라도 끼니를 거르지 마십시오.”

내 걱정일랑 그만 두시고 장모님과 부인 걱정을 하시오.”

용인 이씨는 신명화에게 인사를 한 뒤에 친정인 강릉으로 내려갔다. 신명화는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을 하였다. 강릉과 서울을 오가는 길은 힘든 여정(여행의 과정이나 일정)이었으나 신명화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더구나 큰 아이로 딸을 낳았기에 이번에는 꼭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남편인 신명화는 별로 개의(어떤 일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거나 신경을 씀)하지 않았다.

 

연산왕 10(1504) 1019.

동쪽으로는 동해 바다가 넘실거리며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는 강릉의 북평, 동네에서 가장 큰 기와집에서는 부산(급하게 서두르거나 시끄럽게 떠들어 어수선함)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용인 이씨의 어머니인 최씨는 뒤뜰의 장독대에서 그릇에 물을 떠놓고 손을 비비며 용인 이씨가 아들을 낳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장독대 주변에는 검은색을 띤 대나무가 있었다. 바로 오죽(烏竹)이었다.

삼신할머님이시여,

이번에 저의 딸이 아들을 낳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아들이 귀한 집이니 꼭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최씨에게 여자종이 달려왔다.

마님, 작은 마님께서 딸을 낳았습니다.”

최씨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실망하였다가 딸을 생각하여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들이야 다시 낳으면 되지.”

최씨는 아기를 낳느라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된 용인 이씨에게 달려갔다.

수고했다.”

용인 이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하인에게 소식을 들은 신명화도 용인 이씨를 위로하였다.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지 않았소. 너무 상심(슬픔이나 걱정 따위로 속을 썩임)하지 마시오.”

남편의 위로에 용인 이씨는 고마웠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용인 이씨는 고개를 이불에 묻었다.

신명화는 초롱초롱 빛나는 딸아이를 보며 용인 이씨에게 물었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으면 좋겠소?”

소녀가 무슨 면목이 있어 이름을 짓겠습니까?”

부인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면목, 면목이 없다라고 합니까?”

큰 죄를 지었지요.”

부인의 정성을 보더라도 조상님들이 모두 이해해주실 것이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부인!”

!”

이 녀석의 눈이 너무 어질고 착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름을 ‘‘어질고 착하게 살라는 뜻에서 인선(仁善)’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인선이라고요? 좋은 이름입니다.”

그리하여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이의 이름은 인선이 되었다. 이 때에 여자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원래 남자들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자들은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이름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신사임당은 이렇게 아버지인 신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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