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 213

안동의 파락호, 김용환선생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가리키는 말이 '파락호(破落戶)'라고 말한다. 안동에서 파락호의 대명사로 불려지는 사람이 바로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선생이다. 김용환선생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다. 김용환선생은 안동지역의 노름판을 쥐고 흔든 사람이었다. 저녁 무렵에 시작한 노름이 새벽에야 끝나는데, 막판에는 판돈을 모두 걸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지면 "새벽 몽둥이야!" 라고 김용환선생이 소리치면서 수하의 사람들이 판돈을 덮쳐 자루에 담아 유유히 사라지곤 하였다. 이렇게 노름으로 김용환선생이 종가 재산으로 전해진 논밭 18만평(오늘날 가치 400억원)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선생이 만주에 독립군 자금을 댄 독립투사임이 死後에 ..

동작구 흑석의 심훈

일제 강점기 소설가로, 시인으로, 영화인으로 활동한 심훈. 동작구 흑석성당에 심훈의 생가터와 좌상이 있다. 흑석동에서 태어난 심훈은 아명으로 삼보(三保), 또는 삼준(三俊)으로 불리웠다. 1917년 조선 왕족인 이혜영과 혼인하였으며, 3.1운동에 참여하여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1927년 일본으로 가서 영화 공부를 하고, '먼동이 틀 때'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 주관한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할 때 장편소설 '상록수'를 집필해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저항 의식과 예언자적 지성, 민중적 생명력을 문학으로 나타냈다. 대표작으로 , , 와 시 '그날이 오면" 등을 남겼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C...

세한도를 우리에게 전한 손재형선생님

조선 후기 서예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청나라까지 알려진 김정희,김정희는 중국에서 맥이 끊긴 서법을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고유의 서체를 완성하였다.1840년, 김정희의 나이 쉰다섯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다.이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경주 김씨인 김정희 일가가 피해를 보았다.김정희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어 9년을 보냈다.제주도 유배를 갔다고 하는 것은 김정희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그러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청나라를 드나들면서 서책을 가져와제주도에 있는 김정희에게 보냈기에 김정희의 유배지 생활은 외롭지는 않았다.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그림으로 나타냈으니, 바로 〈세한도(歲寒圖)〉이다.이상적은 〈세한도(歲寒圖)〉를 헌종 ..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정의공주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번지에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의 무덤이 있다. 정의공주 묘역, 위의 오른쪽이 정의공주묘이다(출처:진성규교수님) 정의공주는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 세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에서 정의공주의 공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이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사투리를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왕자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가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족보이므로 정의공주에 대해 과장했을 수도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관계가 있으므로 기록이 남겨졌을 것이다. 관찰사를 역임한 안망지의 아들 ..

의령출신 독립지사 안희제선생

안희제선생은 1885년 음력 8월 4일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인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글쓰기에 뛰어났다. 뛰어난 글쓰기는 17세 때 의령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가장 먼저 시를 써서 제출하였다. 이를 본 의령군수가 칭찬을 하고 후한 상을 주었다. 이때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조욕유한심벽곡(鳥欲有閑尋僻谷) 일렴편조도중천(日慊偏照到中天)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골짜기만 찾아드는데 해는 편벽되기를 싫어하여 중천에서 광채를 더한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양정의숙을 졸업하였다. 1916년 의령에 있는 논밭 2천마지기(1마지기는 2백평)를 팔아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을 파는 백산상회를 세웠다. 191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각지..

바로 보아야 할 이인직

이인직이라고 하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 를 지은 사람으로ㅡ 알고 있다. 그런데 이인직이 친일파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인직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였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윤옥 시인의 시집 에 소개되고 있다. 이완용에게 일본과의 병합에 대해 종용했다고 한다. 즉, "최근 저는 이수상(이완용)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삼가 아뢰었습니다. 2천 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 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이 취할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일본과의 병합에 굉장히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원각사를 세운 것도 친일 매국노인 송병준과 함께 세웠다고 하니 신빙..

양구 박수근화가

대한민국 서양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인 소재를 소박하고 서민적인 분위기로 잘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박수근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매일 산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봄이 오다"가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1953년 대한민국 미술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다. 그 뒤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의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수근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 공간감을 무시한 채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운 듯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지는데, 대표작으로는 '절구질하..

한국인 최초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 선수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인은 '손기정은 한국인임'을 알게될 테니까요" 라고 회고하여 손기정 선수의 애국심에 바탕한 정신력을 엿볼 수 있었다. 시상식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침울한 표정으로 치욕의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올림픽 대표선수를 뽑을 때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를 차지한 남승룡 선수와 함께 한국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

한국인 최초 비행사 안창남

일제 강점기의 비행기 조종사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최초로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땄다. 안창남은 1922년 일본에서 비행사 자격을 딴 뒤, 비행기 양편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서 시범 비행을 했다. 안창남이 5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멋지게 하늘을 날자 많은 청소년들이 비행사가 되기를 바랐고, 국민들의 생각도 한층 근대화되었다. 1923년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들 손에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자, 안창남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항공 학교 교관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하루빨리 우리도 비행기 공장을 세우고, 비행술을 익히자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그러나 1930년 4월 비..

여성독립운동가 수원 기생 김향화

1897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난 김향화,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경기도 수원에 살던 정도성과 결혼을 했으나, 정도성에게는 김향화보다 6세나 많은 딸이 있었다. 결국 18세 되던 1914년에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왔으나, 같은 해 5월에 부친의 사망으로 집안은 더욱 기울어졌다. 이에 김향화는 가족 부양을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1918년 이라는 홍보책자에 32명의 기생 중 1인으로 소개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그녀의 멋을 더하였다. 순한 성품에 귀염성이 있었다. 탁음이 섞인 애원성이 있는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특기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서울에서 울려퍼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향화, 수원에서도 3월 16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