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류성룡

[스크랩] <소설 징비록>과 나

윤의사 2015. 2. 5. 16:56

<소설 징비록>은 완전 신작은 아니다. 1998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한 소설 <당취>에서 이미 다룬 것이다.

연재를 마치고 모두 5권 짜리 대하로 출간했는데, 이후 <소설 토정비결>을 내고 있던 해냄출판사에서 기존 소설 토정비결을 1부로 삼고, 당취를 2부로 삼자하여 그러기로 했다. 그때 3권이던 소설 토정비결을 두터운 2권으로 묶었는데, 당취 5권도 2권으로 묶다보니 아무리 두껍게 해도 2권으로 줄이기엔 어려워 전쟁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말하자면 5권 중 2권 분량을 들어내어 나머지로 2권 분량을 억지로 맞춘 것이다.

그러잖아도 주인공 불두와 여진의 애절한 사랑과 첩보활동 등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너무 자세한 전쟁 이야기가 도리어 독서 흐름을 방해한다 지적이 있던 참이었다.

 

- 왼쪽이 5권으로 출간한 <당취>. 오른쪽 <소설 토정비결> 4권 중 3권, 4권이 당취다.

이후 5권짜리 당취는 절판했다. <소설 토정비결>은 500여 쇄를 찍었기 때문에

표지만 봐서는 나도 구분을 못한다.

 

이후 내 컴퓨터에서 잠자고 있던 이 원고를 책이있는마을 강영길 사장이 도로 불러내었다.

다만 당취를 연재할 때는 몰랐는데 사라졌던 우리 선조의 책 <호종일기>가 그 사이 책으로 나와 내가 모르던 임진왜란 내용을 더 자세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리 할아버지가 전시재상 유성룡을 찾아가 임진왜란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우리 할아버지, 정확히 말하면 이관과 이효원 부자는 임진왜란 당시 몽진하는 임금 선조를 따라 호종했다. 이조참의이던 이관 할아버지가 호종하였기 때문에 당시 6품에 있던 이효원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호종한 것이다. 그때 이관 할아버지도 신병이 있어 호종하지 않아도 뭐랄 사람이 없었는데 공신 집안 출신으로 국난을 피하면 안된다 하며 기어기 몽진길에 합류하셨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북방의 여진족과 남해의 왜구를 적으로 맞아 싸워왔고, 그때마다 공훈을 세웠는데, 이관 할아버지와 이효원 할아버지는 비록 문관이었지만 이런 집안 가풍으로 호종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 이효원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사관이 흩어져 임금의 동정을 자세히 기록할 처지가 못되었는데, 다행이 이효원 할아버지가 왕과 세자를 따라다니면서 사초나 다름없는 기록을 남겨 선조실록에도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이다.

호종일기에도 전시재상 유성룡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 이효원 할아버지가 유성룡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나는 유성룡이 낙직하여 은퇴한 뒤 지병에 걸려 운신하지 못할 때, 당시 승지이던 이효원 할아버지가 그를 찾아가 징비록과 호종일기 두 권을 나란히 펼쳐 놓고 임진왜란을 복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이효원은 그뒤 대사간이 되었지만 당쟁에 휘말려 거제도로 귀양을 가게 되고, 이후 충청도 청양으로 은둔한다. 이후 우리 집안은 인조반정에 참여해 다시 공신집안이 되었다.

 

나는 이관 할아버지와 이효원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마을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우리 할아버지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고, 큰 제사 때 어른들을 따라가 넙죽 절한 것 밖에 없다. 두 분이 임진왜란의 산 증인인 줄 뒤늦게야 안 것이다.

 

-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사셨다. 이 집 뒤에 이관, 이효원 할아버지의 묘소가 위아래로 있다.

나는 중학교 때 잠시 이 마을 당숙에 붙어 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여기서도 30리 가량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짜기 운곡이란 곳이다. 청양도 은둔 차 내려간 것인데, 여기보다 더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갈 때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아픈 사연이라 이건 말 못한다.

 

한 가지 미안한 게 있다. 임진왜란을 다루면서 임금을 비롯해 여러 관리들을 호되게 비판했는데, 사실 부끄러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이관 할아버지의 동생이 이각인데, 이 분이 당시 경상좌병사였다. 즉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질 때 마땅히 구원해야 할 지역사령관이셨는데, 동래성도 구하지 못하고, 그나마 울산병영도 지키지 못했다. 그뒤 임진강 전선에 복귀했지만 왕명으로 참수를 당하셨다. 이런 할아버지를 둔 내가 당시 백성을 지키지 못한 다른 장수들을 비판한다는 게 어불성설인 줄 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우리 집안 문제는 우리 집안에서 끝나는 것이고, 역사는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점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이각 할아버지가 참수당하시던 날, 이관 할아버지와 이효원 할아버지 부자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우셨다고 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셨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그 황망한 중에 달아난 장수가 한둘이 아닌데 이각 할아버지는 신각과 함께 본보기로 처형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관으로서 임지를 벗어난 책임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에서 내 직계 조상을 객관적으로 비판하였다. 삿갓 김병연이 난군에 항복한 할아버지를 비판했다 하여 평생 삿갓을 쓴 채 살았다지만 난 그러지 않겠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영화 <국제시장>처럼 박정희 시대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치부는 하나도 안보여준 것처럼, 나도 이각 할아버지의 존재를 슬쩍 감추면 그만이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역사는 사실 그대로 기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각 할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미화하거나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게 내 핏줄에 흐르는 그분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명단을 부록으로 달아드렸다. 그러면 좀 위안이 되려나싶어서다.

<나와 토정 이지함의 400년 인연>

출처 : 알타이하우스
글쓴이 : 알타이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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