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 213

이벽과 절명시(絶命詩)

이벽은 본관이 경주이고, 본명은 덕조(德祚)이다. 성호 이익은 이벽에게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지하기도 하였다. 정조 1년(1777)에 권철신과 정약전 등과 천주교에 관한 토론회를 가진 후에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이승훈에게 '요한'이라고 영세를 받고 남인들 사이에서 선교에 힘썼다. 정약용의 스승이기도 한 이벽은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매제이다. 정조 9년(1785)에 김범우의 체포로 서학이 탄압을 받게되는 을사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이벽의 아버지인 이부만이 결사 반대를 하자 단식 끝에 15일 만에 순교하였다. 숨지기 직전 절명시를 남겼다. 무협중봉지세사입중천(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은하열숙지년금천천국(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 무협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형세로구나/ 이제 죽어서..

전라남도 나주 나대용장군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가면 나대용장군을 만날 수 있다. 나대용 장군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36세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했으며, 발포만호의 임시지휘관을 맡기도 했었다. 나대용 장군은 조선 기술뿐만 아니라 전술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옥포해전에서 왜군 전선 두 척을 부쉈으며, 사천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도 분전했던 용장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창선이라는 특수한 배를 만들었으며, 해추라는 일종의 쾌속선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사진제공:한림촌부의 행방기

녹두장군

넓은 들판 에 2채의 초가집이 보인다.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녹두장군 생가는 세 칸 짜리 낡은 초가집으로 방, 부엌, 건넌방과 마당 한쪽에 있는 창고가 있는 허름한 집이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집을 둘러보며 장군의 불의와 싸우는 꿋꿋한 정신을 되새기며, 생가 이외에 깊은 감동을 줄만한 자료가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녹두장군집을 떠나 황토현으로 갔다. 황토현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둬 사기를 크게 높인 싸움터이다. 농기구와 대나무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에 비하여 정규군 800명과 보부상 부대 1300명으로 구성된 관군은 총과 대포 등 신식 무기를 갖춘 부대였다. 그러므로 동학군과 관군의 ..

조선 19대 임금 숙종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현종 2년(1661)에 태어났다. 숙종은 양란 이후의 정치, 경제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과 경제를 안정시켰다. 그는 붕당정치를 이용하여 관리들의 세력균형을 꾀하였다. 그리고 양란과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북한산성을 수축하면서 남한산성과 더불어 한성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확정지었고, 안용복의 활약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의 출입을 막았다. 경제적으로 가장 큰 업적은 상평통보의 사용을 보편화시켜 조선말기까지 사용하게 한 점이다. 이전까지 많은 동전을 주조하였으나, 상평통보만큼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백성들에게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소시켜주었으며, 일본과의 무역을 통하여 상평통..

영주 금성단

금성대군은 세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한 후에 그는 수양대군 등과 함께 단종 앞에 나아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금성대군도 안평대군처럼 수양대군과 평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홉 살이나 위인 수양대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금성대군은 형식적인 말로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1453년 염려한 대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자 더욱 단종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러한 금성대군의 심정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삭녕으로 유배보내고 말았다. 이때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독촉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1455년이었다. 1456년 사육신 ..

시인 김수영

대한민국의 시인인 그는 현실 비판과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김수영은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와 박인환을 만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인환, 김경린 등과 함께 시집을 펴내 근대적인 경향을 드러냈다. 초기에는 현대 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썼는데, 한자어를 비롯한 어려운 어휘를 즐겨 써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겪고 난 뒤 어려운 말들이 많이 사라졌고, 소재도 일상 생활에서 끌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4.19 혁명이 일어나자, 현실 비판과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시로 표현했다. 김수영이 남긴 시집은 , , 가 있고, 산문집으로는 , 가 있다. 시비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저항하면서 ..

조지훈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국문학자이다.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민족성을 살리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힘썼다. 올해는 조지훈 탄생 100주년이다. 조지훈은 꽃탑소년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인 재능을 키우기 시작했고, 1939년 4월 에 '고풍의상'을 발표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는 전통적인 소재들을 세련된 시 속에 담아 어두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해방 이후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어, 민족성을 살리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힘썼다.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데, 한국 현대시는 김소월, 김영랑에서 비롯되어 서정주,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로 이어진다. 이처럼 조지훈은 현대시사에 중요한 한획을 그었으며, '승무', '풀잎단장', '역..

여성독립운동가 두진훼이 선생

두진훼이 선생은 독립운동가 김성숙(창숙) 선생의 부인이다. 김창숙 선생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는 길에 용문사에서 17세의 나이에 출가하였다. 그 뒤 봉선사로 옮겨 한용운, 손병희와 사귀며, 1919년 3월 봉선사에서 시위운동을 펼쳤다. 두진훼이 선생은 중국 현대사에서 지식인이요 혁명가로, 그리고 중국 여성을 근대화시키고자 한 인물이다. 중국 광저우(廣州) 중산대학을 나온 재원으로 중국 수상을 역임한 주은래의 소개로 1929년에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과 혼인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위해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1943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 1945년 5월 한국구제총회 이사로 활약했다. 독립운동 ..

녹천 고광순

녹천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함께 전사한 고경명과 고인후의 12대손 및 11대손이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1848년 2월에 출생하였다. 1895년 왜놈의 칼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과 함께 을미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거하였다. 녹천은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유격전으로 일본과 맞섰다. 1907년 지리산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의병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고광순의 나이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12대조 고경명과 같은 나이인 60세였다.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킨 기치로 '家國之讐(가국지수)를 갚자'였다.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조상의 원수이기도 하며 국모를 시해한 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뜻일 것이다. 고광순이 마지막으로 함께 의병전쟁을 일..

동학 2대교주 최시형

동학의 제2대 교주 심한 탄압 속에서도 열심히 포교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법적으로 동학을 인정받기 위해 온건하게 투쟁하였으나,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교조 신원 운동과 갑오 농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릴 대 이름은 경상,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다. 최시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어렵게 자랐다. 하지만 의리가 있어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경주에 살 때는 마을 대표인 집강으로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는 생활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서른 살이 넘어 최제우를 만났다. 그 후 매달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도를 닦으며 동학의 진리를 깨우쳐 나갔다. 그런 다음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학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