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 213

양평의 노비 시인, 정초부

동호(東湖) 東湖春水碧於藍 白鳥分明見兩三 柔櫓一聲飛去盡 夕陽山色滿空潭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을 채우나니 이 시는 정초부(鄭樵夫)라는 노비 시인이 지은 시이다. 초부는 나무꾼이라는 뜻이기에, ‘정씨 나무꾼’으로 조선시대 최하층 신분이라 하겠다. 그는 조선 정조 때 사람으로 지금의 양평 지역에서 여씨 집안의 노비였다. 한시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 등 10개가 넘는 규칙과 문학성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해야만 한다. 여춘영 부친은 어깨 너머로 들은 한시를 한번 듣고 암송하는 정초부의 천재성에 감탄해 글을 가르쳤으며, 여춘영은 그와 함께 공부하면서 ..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외국인2

위서방(웨이쉬팡)은 1923년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인 중국 안둥(安東)성 안둥(安東)시에서 태어났다. 신의주에서 살다가 1945년 안동성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부군 대위로 근무했다.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나자 신의주로 돌아와 평양 인근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했다. 화교 청년들과 함께 한중반공애국단을 조직해 1950년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을 도왔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해 허가를 받자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하자 위서방과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 단원 30명도 함께 한국으로 남하해 화교단원을 중국수색대로 다시 편성..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잠든 외국인

6·25사변은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우리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인명을 살상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은 중국인에게도 동족상잔의 아픔을 전해준 전쟁이었다. 6.25사변이 발발했을 때 장제스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면서 화교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비공식적 지원을 하였다. 유엔의 지원으로 통일이 되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군대가 '미(美) 제국주의의 확산을 막고 혈맹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아픔을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지켜내고자 젊음을 바친 분들을 소개하며 감사와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강혜림 의사는 192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산동성 서하현에서 태..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 손원일 제독

손원일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원일은 아버지 손정도가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는 가르침대로 조국의 미래는 바다라고 생각하고 일제 치하에서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원일은 영국에서 상선의 선원이 되어 5대양을 누비며 항해술을 익혔다. 이때 부친 손정도가 일제의 고문과 과로로 49세로 순국했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많이 슬퍼했다고 전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한 손원일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에 힘썼다. 가산을 털어 '해사대'라는 이름의 조직으로 80여 명의 젊은이를..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권기옥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권돈각과 어머니 장문명 사이의 1남 4녀 중 차녀태어났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이름을 ‘갈네’라고 지었는데, ‘가라’는 뜻으로 '얼른 죽으라'는 의미로 아들선호사상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권기옥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지만, 아버지의 노름으로 많던 재산을 날려 살 집도 없어 남의 집 문간방에 살았다. 권기옥은 11살이었지만 학교는 꿈도 못꾸고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어깨너머로 언니의 책을 들여다보며 글자를 배우던 그녀가 12세 되던 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송현소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송현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숭의여학교(현 숭의여자 중·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다녔다. 권기옥은 17세 때 평양에서 미국인..

브릭으로 만나는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

김란사는 1872년 9월 1일 평안남도 안주군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무역업을 하는 부친 덕에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공부에 뜻이 있었으나 여자라서 서당에 다니지 못하자 아버지를 설득해 집에서라도 공부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공부하려는 것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결혼 후엔 기혼자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던 이화학당에 하인과 함께 프라이 교장을 찾아가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끄며 자신의 앞날이 이렇게 어두우며 조선의 현실이 이렇게 어두우니, “꺼진 등에 불을 켜고 싶다”라는 그의 의지가 받아들여져서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서재필 박사가 정동 교회에서 미국인들이 남녀차별 없이 활동하는 것에 감동을 하여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남편 하상기 씨와 도미하여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공부했다..

독립운동가 황기환

드라마 ‘유진 초이’ 역의 실제 인물인 황기환 지사의 유해가 지난 10일 국내로 봉환되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김태리(고애신 역)가 한 마지막 대사 "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봅시다"(See you again)"가 황기환 지사의 순국 100년만에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1886년 4월 4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황기환 지사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서 활동했다. 191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지원병으로 입대해 소대장으로 중상자 구호에 힘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 김규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을 맡아 를 제출해 유럽 내 각 언론기관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 및 저명..

오늘은 서울여학생만세시위운동주도 송계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1930년 3월까지 이어지는데, 서울에서는 1930년 1월 15일과 16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송계월 지사이다. 송계월 지사는 1911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에서 송치옥과 이순희 사이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부이자 신창사회청년구락부 및 북청 노동연맹 회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상 방면의 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신창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신창 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은사 김용식의 영향을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열다섯 살에 "서울에 대한 동경심과 더 배우겠다는 향학열"로 상경하여 1927년 4월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교장의 친인척 교사 채용, 한국인 교사의 부당 해..

어머니의 자식 사랑

양희수가 전라도 영광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가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배가 고팠으나 주위에는 주막이나 민가도 없었다. 민가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다 허름한 집을 찾았다. 양희수가 인기척을 하니 소녀가 나왔다. "내가 시장해서 그런데 밥 한끼 먹을 수 있겠소?"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기꺼이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 내왔다. 소녀의 정성에 감동한 양희수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이것은 고마움으로 내가 그대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네." 하면서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을 주었다. `채단'이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이다.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급히 안방으로 가서 보자기를 가져와 "청선과 홍선을 이 보자기에 주시지요." 라면서 펼쳤다. "아니 웬 보자기를..." "폐백에 바치는 ..

오늘은 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 타계

어윤희는 1880년 6월 20일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자문’과 ‘대학’까지 가르칠 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특히 “말은 충성되고 진실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며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강조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 결혼했지만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에 참여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1896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니 삶에 회의를 가진 어윤희는 고향을 떠나 10여 년간 평산, 해주 등지를 떠돌다가 1909년 개성에 정착했다. 3.1운동의 33인 중 한 명인 정춘수의 설교에 감동해 개성북부교회에서 갬블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애국계몽운동가가 되었다. 그녀는 갬블선교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