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정치가
불의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꿋꿋이 지킨 진보적인 유학자이다.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앞장선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성균관 대학을 설립해 교육 운동에도 힘쓴 교육가였다. 다른 이름은 김우,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또는 벽옹이다.
김창숙은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노비를 풀어주고 계급을 없애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새로운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1905년에 일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김창숙은 스승 이대계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을사조약에 찬성한 5명의 관리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가 무시되고 오히려 감옥에 갇혔다.
그 뒤로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협회에 들어가 활동하며, 무엇보다 계급을 없애고 신분을 평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명학교를 세워 신분의 구분없이 학생들을 받아들여 교육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결국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김창숙은 울분을 삼키며 유학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유림을 이끌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학자 130여 명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며 서명한 진정서를 들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우편으로 보냈다. 이것이 ‘파리 장서 사건’이다. 김창숙은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려고 귀국했다가 붙잡혔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다시 중국으로 나가, 1921년 신채호와 <천고>를 발행한 데 이어, 박은식과 <사민일보>를 발간하여 독립 정신을 드높였다. 또한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을 만나 독립 운동 기금을 원조받기도 했다.
김창숙은 1927년에 상하이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붙들려 모진 고문을 받고 앉은뱅이가 되어 풀려났다. 하지만 그 뒤로도 창씨 개명에 거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은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를 반대하고,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려 할 대도 김구와 함께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전국의 유림 세력을 한데 모으기 위해 유도회를 조직하고, 유교의 근대적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성균관대학을 세워 초대 총장이 되었다.
김창숙은 이승만 정권이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자 이승만에게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다 감옥에 갇히고,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 여당 쪽에서 보낸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김창숙의 힘겨운 투쟁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날 때가지 멈추지 않았다.
Tip) 두 아들을 항일 투쟁에 바치다
김창숙의 큰 아들이 북경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했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받은 김창숙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 그러나 치료 중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나는 대한 사람으로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 논자에게 변호를 맡긴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무료 변론을 거부했다.
뒤에 김창숙의 둘째 아들도 10여 년의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다가 중경에서 숨져, 망명 동지들에 의해 유골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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