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3일은 흥사단이 만들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흥사단을 만들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앞장 선 안창호 선생에 대해 쓴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
비밀 단체인 신민회를 비롯해 많은 항일 단체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 역량을 키웠다. 특히 자주 독립을 이루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민족을 계몽하고 독립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호는 도산이다.
안창호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청나라와 일본이 벌이는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이 이처럼 강대국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안창호는 서울로 올라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 학당에 들어가 서구 문물을 접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어 독립 협회에 들어가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고향에 점진학교를 세워 신식 교육을 실시하다가, 새로운 학문을 더 공부할 필요를 느끼고 미국으로 떠났다.
신민회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 역량을 키우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교포들의 단결을 위해 한국인 친목회를 만들고 공립 협회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야학을 세워 교육시키고, <공립신보>를 펴내 교포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을사 조약이 맺어지자, 안창호는 곧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 단체인 신민회를 만들었다. 국민의 역량을 키워 자주 독립을 이루려는게 가장 큰 목표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민중 운동을 이끌고,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세워 청소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민족 산업을 키우기 위해 출판사인 태극 서관을 세우고, 도자기 회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3개월간 옥살이한 뒤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흥사단을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펴다
안창호는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어 미국 교포 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듬해에는 흥사단을 만들어 청소년 교육 등에 힘쓰며, 대성 학교와 신민회에서 못다 이룬 뜻을 이어 나갔다. 무실역행을 바탕으로 하는 흥사단 정신, 즉 참되도록 힘쓰자는 ‘무실’, 힘써 행하자는 ‘역행’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전하는 의미가 크다.
안창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곧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고, <독립신문>을 펴냈다. 그러다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과 관련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보내졌다.
1935년에 옥살이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 병을 얻어 풀려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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