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윤봉길의사

윤의사 2012. 4. 24. 14:21

금주 일요일인 4월 29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기에 중국 장개석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가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의사의 본관은 파평이고, 고려 때 동북 9성을 개척했던 윤관장군의 28세손이다.

윤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윤황과 어머니 경주 金씨 원상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윤의사는 6세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ㆍ1 운동을 계기로 일제 식민지 교육에 반대, 자퇴하고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때 성주 배씨 용순과 결혼하면서 신문잡지를 구독하고 신학문 서적에 관심을 가지며 열심히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윤의사는 19세 때인 1926넌부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서 야학, 독서회, 강연회 등을 하였다.


윤의사는 23세때인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글을 남기고 망명길에 나섰다.

선천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달 여 감옥에 살다 풀려나 만주와 중국 대륙을 전전하다 1931년 5월에 김구를 만났다.


때마침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였고,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훙커우 공원에서 갖기로 하였다.


윤의사는 4월 26일 한인애국단원이 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의사는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金九 단장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오전7시 50분경 훙커우 공원에 입장하였다.


일본국가가 끝날 무렵 윤의사는 단상을 향해 수통폭탄을 투척하였다. 이때가 오전11시 40분경이다.

윤의사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가와바다 사다쓰구 거류민단장이 즉사하였으며, 그 외에 많은 일본 고관들이 부상을 당했다.


윤의사의 의거는 장개석이 “중국의 4억 인구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면서 한중이 공동으로 항일전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의사는 의거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5월 25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7시 40분경 향년 25세로 순국하였다. 순국현장 인근 쓰레기 하치장 통로에 매장되었던 윤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 1946년 6월 30일 조국에 반장되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인애국단에서 선서를 마친고 기념촬영한 윤봉길의사

 

효창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