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정치가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민족 자본을 키우고,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나갔다.
일제에 대해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정신으로 대항해 ‘조선의 간디’로 불린 민족의 지도자였다.
호는 고당이다.
조만식은 하나뿐인 아들을 잘 가르치려는 부모의 정성 때문에 여섯 살 때부터 스승을 두고 공부하였다. 그는 열다섯 살 무렵에 상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해, 젊은 나이에 번듯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술자리가 잦아 건강을 해치자, 친구의 권유로 술과 담배를 끊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예 사업을 접고 숭실중학교에 다녔는데, 그 시절에 듣게 된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다니면서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평생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으로 민족 경제의 자립을 꾀하다
조만식은 일본의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2년 뒤에 교장이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1년 간 옥살이를 하였으며, 결국 일제의 압력으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만식은 1921년에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와 산정현 교회 장로가 되어 일하였고, 이 무렵 알게 된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펴나갔다. 이 운동은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려는 것으로, 특히 일본 상품을 물리치고 국산품을 쓰자고 주장하였다.
그 이듬해 송진우 등과 함께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한 일제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위해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이간질로 조직이 무너지고 말았다.
1932년에는 거의 폐간 위기에 놓인 <조선일보>를 떠맡아 살려내어 민족 언론을 굳건히 지켰다. 이;처럼 조만식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다
해방이 되자, 조만식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조선 민주당의 당수가 되어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조만식은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함께 일하자는 소련과 공산당의 강요를 거듭 물리치다 결국 갇히는 몸이 되었다. 조선민주당 당원들이 구출하러 왔지만, 그는 북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며 한사코 따르지 않았다. 조만식은 동지들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홀로 남아 투쟁하다 1950년에 공산당에게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Tip) 우리 발엔 짚신이 최고여
하루는 조만식의 아들이 구두를 신고 으스대며 들어왔다. 마침 물산 장려 운동을 펴고 있던 조만식은 기가 막혔다. 우리 물건을 쓰고 아끼며 살자는 뜻을 아들마저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조만식은 말없이 가위를 가져와 구두를 뚝뚝 잘라 냈다. 구두가 망가지자 아들은 울먹이며 따져 물었다. “구두를 왜 못신게 만드십니까? 기왕에 돈 주고 산 것이니 신는 편이 더 아끼는 것이 아닌가요?” 아들의 말에 조만식은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비싼 구두를 신는 건 낭비이다. 게다가 형편이 좀 나은 집일수록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한다. 네 손으로 짚신을 삼거나 싼 고무신을 신도록 해라.”라고 타일렀다. 아들은 속상했지만, 아버지의 참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통일을 그리 듯 조만식 선생의 동상이 오두산 공원에 서 있다.
임진강이 조강을 만나는 곳, 멀리 북한 마을이 보인다.
한강이 끝남이 아쉬운지 큰 울음을 내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한강과 북에서 흘러오는 임진강이 조강에서 만나 듯
남북한이 힘을 합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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