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종교인 동학의 창시자
조선 시대 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 종교인 동학을 만들었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며 신분제에 갇힌 조선 유교 사회를 개혁하고,
거세게 몰려오는 외세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다른 이름은 제선 또는 복술, 자는 성묵, 호는 수운 또는 수운재이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학식이 깊은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최제우가 자랄 무렵 조선 사회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나라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의 횡포 아래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고,
밖으로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양 강대국들이 우리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최제우는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현실에서 백성을 구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구도의 길에 들어섰다.
최제우는 10여 년 간 도를 찾아 떠돌다가, 울산 유곡에 들어와 머무르며 도를 닦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 용담정에서 마침내 천명을 깨우치고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을 일으키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를 토착 민간 신앙과 합치고,
천주교의 영향도 받아 민족 종교인 동학을 만들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귀하므로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동학의 평등 사상은 조선 유교 사회를 받쳐 주던 신분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있던 ‘서학(천주교)’에 반대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며,
민족의 자주성을 드러낸 것이다.
동학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고 앞장서다
최제우가 모든 백성을 널리 구하고, 나라를 지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길로써 동학을 알려 나가자,
그 동안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과 몰락한 양반을 비롯한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최제우는 각 지역에 접소라고 하는 일종의 포교 전당을 마련하고,
그 지방의 교도 중에 덕망 있는 사람을 접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설치된 접소가 15개에 달하고, 교인이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제자 최시형을 제2대 교주로 삼아 자신의 뒤를 이어 동학을 이끌어 가게 하였다.
양반 사회가 무너져 가던 시류를 타면서 동학이 빠르게 커 나가자, 나라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속여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죄를 씌워 최제우를 붙잡아 대구에서 처형하였다.
최제우의 죽음 이후에도 동학은 농민 대중의 종교로 퍼져 갔고,
왕조를 부정하는 등 사회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었으며,
3. 1 운동에 이르러 민족 자주 정신을 드높이게 하는 등 한국 근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최제우 초상화
경주 용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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