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이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선조는 홍문관 수찬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홍문관은 임금이 정치를 하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자문하는 기관입니다. 수찬은 정6품의 관리였다. 그러므로 류성룡은 선조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조가 경연을 하였습니다. 경연은 조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경서(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사서 오경)를 읽고 토론하거나 나랏일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모임이었습니다.
“과인을 중국의 태평성대시대의 성군인 요임금, 순임금과 폭군인 걸주와 비교한다면 누구와 가깝다고 생각을 하시오?”
이때 한 신하가 나섰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태평성대로 요순과 같은 군주이시옵니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아니옵니다. 걸주와 같사옵니다.”
이 말에 선조의 얼굴은 화가 나서 붉은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류성룡이 급히 나서며 아뢰었습니다.
“두 분 말씀이 모두 옳은 줄 아옵니다. 요순시대의 태평이라는 것은 전하의 성덕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걸주와 비교한 것은 아마 전하께옵서 앞으로 교훈을 삼아 경계를 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 일로 성룡은 임금을 비롯한 관리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조 11년(1578), 하늘에서 몇 개의 혜성이 떨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 혜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나라에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고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는 금성이 하늘에 흰 비단을 펼치듯 빛나다가 얼마 후에 사라졌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자 성룡은 불안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아무래도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모저모 잘 살펴서 나랏일에 어긋남이 없도록 애써야겠다. 백성들도 불안해하는 것 같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좋아.’
류성룡은 마음을 가누며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선조 13년(1580), 39세인 류성룡은 상주목사가 되었습니다. 성룡은 어명을 받고 평소 생각해 오던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더구나 상주에서는 고향인 안동까지 가까워 선정을 펼 수 있고, 서울로 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에 대한 방어 준비도 할 수 있어 무관으로서의 기개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류성룡은 길라잡이 한 명과 짐을 진 하인 둘을 대동하고 상주로 떠났습니다. 여름 소나기와 내리쬐는 햇빛을 번갈아 맞으며 상주에 당도한 것이 중복 해거름이었습니다. 비에 젖고 햇볕에 그을려 행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류성룡 일행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관아는 여러 달 비어 있던 터라 그런지 썰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전 둘이 동헌 마루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류성룡이 새로 부임해 오는 목사임을 알아채고는 놀라서 일어섰습니다.
류성룡은 병방(兵房)을 앞세워 군기창(軍器倉)을 둘러보았습니다. 군기 창고는 류성룡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형편 없었습니다. 칼자루가 빠지지 않는 녹슨 칼 너댓 자루, 자루가 다 썩어가는 창 서너 자루, 촉이 무딘 화살과 활 십수 개, 봉 너댓 개. 이게 전부였다. 나라가 쓰러지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조정만 기강이 무너진 게 아니었습니다.
류성룡은 그제서야 자신을 상주목사로 임명한 연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성룡은 군대를 훌륭히 키워 왜구를 물리치리라는 꿈이 얼마나 멀고 험한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선 상주목의 방비라도 튼튼히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더욱 길러 경상도를 방비하고, 또 나라를 방비하게 하면 될 터였습니다.
“모든 군졸을 한자리에 모아라.”
류성룡은 수행하던 병방에게 일렀습니다.
얼마 안 있어 현의 군졸이 모두 모였습니다. 대략 사오십 명 정도였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뚤레뚤레 하며 모여드는 품이 장 구경하는 장꾼보다 더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게다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무기도 없이 맨손이었습니다. 저래 가지고 어찌 왜구를 물리치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왜구는 커녕 좀도둑도 지키기 어려울 형세였습니다.
“듣거라. 내 오늘 이곳에 당도하여 현황을 둘러본즉슨, 모든 일이 주인 없는 집과 같이 돌아가고 있었느니라. 한 고을의 방비가 이 모양이라면 나라의 수비는 어찌 하겠는가? 지금까지는 고을 수령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이리 된 모양이다만, 내일부터는 정식으로 모든 업무를 개시할 것인즉 군졸들은 모두 제 자리를 지켜 추호도 빈틈이 없도록 하라. 특히 각자 배당받은 무기가 있을 것인즉, 내일은 그것을 다 들고 나오도록 하라.”
군졸들을 해산시킨 다음 류성룡은 육방 관속(지방 관아의 육방에 딸린 구실아치들)을 불러모아 밤이 이슥토록 상주목의 사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동네마다 곡식이 모자라 아우성이옵니다. 그나마 밭농사도 긴 장마 때문에 반넘어 유실됐사옵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을 호소하며 세금을 내지 않아 관아의 곳간이 거덜날 지경이옵니다.”
호방이 아뢰었습니다.
“전임 사또가 백성들의 민원을 전혀 돌보지 않아 그동안 쌓이고 밀린 공무가 산더미 같사옵니다.”
이방이 고했습니다.
“장마와 무더위 때문에 여름 들어 병으로 넘어지는 자가 많고, 전염병이 돌고 있사옵니다. 군졸들 가운데도 병든 자가 수두룩합니다.”
병방이 보고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난감한 얘기뿐이었습니다. 지방의 어려움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류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한 지도 벌써 한달 반이 넘었습니다. 류성룡은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백성들의 집집마다를 방문하느라 어떻게 날이 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상주 고을. 한양에서 오백 리 멀리 떨어진 곳. 이곳에서 국운을 바로잡을 역량을 키우진 못하더라도, 어려움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만큼은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할 일은 백성들의 속앓이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공무를 공정하게 보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백성들의 살림이 어느 정도 펴지고, 병들어 곯은 가슴도 치유될 것이었습니다.
류성룡은 상주에 사는 양반 지주와 토호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손에는 호방이 작성해온 묵직한 장부가 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고을 양반과 토호의 살림 규모와 토지 목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 한 것은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외다.”
류성룡이 운을 떼자, 좌중은 불안한 기색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내 지난 한달 반 동안 고을의 백성들 집을 다녀보니 그 피폐함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소. 그들은 굶주림에 일어설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이오. 그들은 다 여러분의 토지를 부쳐 먹고 사는 사람들일 터인즉, 여러분의 식솔이나 마찬가지요. 그들을 배부르게 하여 건강하게 하면 여러분한테도 해될 것은 없으리라 믿소. 그래서, 관아에 빈민구제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려 하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누구도 썩 나서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류성룡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는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좋은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빈민구제창고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류성룡이 재차 물었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허나, 우리 고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뿐더러 그 많은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데 어떨는지...”
앞자리에 서 있던 젊은 양반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관아의 곳간은 이미 바닥이 나 있는 지경이라 마땅히 어디서 구할 데가 없게 생겼소. 그래서 내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에 소나 돼지가 굶주린다 해도 곡식을 내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밑에서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이니 주인인 여러분이 얼마간 성의를 표시했으면 하는 것이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자들이 모두 놀라서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후 뒷줄에 있던 늙은 토호가 죽을상을 하고 나섰습니다.
“사또 나으리, 지금은 아직 추수 전이라 어느 집 곳간이나 쥐만 설칠 뿐입니다. 게다가 추수하면 일꾼들 새경 줘야지요, 관에 세금 바쳐야 하니 저희도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헤아려 주십시오.”
류성룡은 그 말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일한 대가로 백성들한테 가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시오? 마소를 부려도 그보다는 더 많이 들 것이오. 그리고, 관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많다면 내 면밀히 살펴서 불필요한 세금은 이 기회에 없애 버릴 테니 세금 걱정일랑 마시오.”
류성룡의 일갈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쑥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상주목사는 경상도의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군사권도 가지고 있소. 국가가 위급할 때 군대를 모아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난을 일으킨 무리를 소탕하기도 하는 중책을 맡고 있소. 지금 이 나라는 위급한 상황이오. 백성이 모두 군사로 나서기 위해서는 굶주림을 면해야 하지 않겠소. 만일 그 군사가 굶주려 쓰러져 있어도 이를 못본 채 한다면 이는 반역자나 마찬가지요. 반역자에게 어떤 처벌이 돌아가는지는 잘들 알고 계시겠지요?”
류성룡의 책망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한 고을에서 목사란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과 군사권까지 쥐고 있어서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들이 정히 내 말에 따를 생각이 없다면, 내 저 가난한 백성들을 모두 군사로 징발하여 훈련을 시키겠소. 그러면 당장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을 터, 그대들이 몸소 삽과 괭이를 들어야 할 것이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류성룡은 이쯤 엄포를 놓고는 본론을 꺼냈습니다.
“내 지금 이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돌릴 터이니 각자 종이에 기부할 금액을 적어 주시오. 넉넉한 분은 넉넉하게, 그렇지 못한 분은 형편껏 써 주시오. 이 장부를 보면 대략의 가세(家勢)를 볼 수 있은즉.”
썩 내키는 표정들은 아니었으나, 다들 앞에 놓인 종이를 끌어당겼습니다. 그러고는 옆 사람이 얼마나 적는가 곁눈질을 해가며 제가 낼 액수를 썼습니다.
류성룡은 양반과 토호들이 내놓은 곡식을 이용하여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지자, 자연 상주목의 군사력은 강해졌다. 처자식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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