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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의병장 윤희순

윤의사 2024. 11. 11. 19:49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는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가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소양강 처녀’ ‘춘천 가는 기차’ ‘겨울연가’ 등 대중가요와 드라마에 등장해 많은 사람이 찾는 도시다. 하지만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여자도 항일전쟁 나서야”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날인 11월 17일을 잊지 않기 위해 193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정했으며, 199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순국선열’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 전후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분들이다. 국가보훈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분은 올해 8월 기준, 1만 8139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3.65%인 663명에 불과하다.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거나, 식사 제공, 군수품 운반 등 독립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은 독립군의 지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 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윤희순이 지은 <안사람 의병가>의 내용이다. 나라를 빼앗기면 남녀의 구별은 소용없기에 여자도 나서서 항일전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 의병장은 무려 8편이나 되는 의병가를 지어,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노래했다.
 윤 의병장은 철종 11년(1860) 8월 11일, 양주군 구지현(현재 구리시 수택동 355번지)에서 부친 윤익상과 모친 덕수 장씨의 세 자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유학자인 윤익상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아 성품이 바르고 총명했다. 
 15세 되던 1875년, 춘천 의병장인 유홍석의 장남이며 의병장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柳濟遠, 1859~1915)과 혼인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을미개혁으로 실시된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도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여성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았다. 이 돈으로 놋쇠와 구리를 구입, 무기 제조 공장을 차려 탄환을 만들고 의병 전쟁을 지원했다. 유황이 부족할 때는 소변을 가마솥에 달여 화약을 만들었다. 
 또한 30여 명의 여성 의병으로 구성된 춘천 여성 의병부대를 조직해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들의 식사 제공과 군복 제작 및 세탁, 탄약과 무기 제조, 부상병 구호 등 의병 전쟁을 뒷바라지했다.

 

춘천에서 찾는 윤희순의 흔적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1911년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윤 의병장도 이듬해 세 아들과 함께 만주 땅으로 갔다. 만주 환인현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벼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마련하고 군자금을 모아 항일운동을 도왔다.
1912년 윤 의병장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린이 등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회영, 우병렬 등의 도움을 받아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세웠다. 이곳에서 김경도, 박종수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윤 의병장은 일본과 싸워 독립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인도 함께 교육했다. 한·중 연합을 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이다.
시아버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가족과 함께 무순으로 이주했다. 무순 포가둔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독립단, 대한독립단 가족부대와 대한독립단학교를 세워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독립군을 훈련했다. 대한독립단은 조선독립단이라고도 하며, 윤 의병장 일가와 유인석 지휘를 받던 의병부대, 황해도 출신 의병, 평안도 출신 의병 약 600명으로 조직됐다. 그녀의 큰아들 유돈상은 대한독립단을 이끌었고, 일부 중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도 세웠다. 
 군자금을 모금해 흩어진 독립군의 재건을 위해 힘쓰던 장남 유돈상은 1935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으로 같은 해 7월 19일 순국했다. 윤 의병장은 장남의 순국에 충격을 받고 식사를 하지 못하다가 11일 후인 8월 1일 40여 년 독립운동의 막을 내리고 순국했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녀의 유해는 중국 해성시 묘관둔에 가매장됐다가, 1994년 고국으로 봉환돼 춘천시 남면 가정리 묘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됐다. 여성 의병장으로 당당한 삶을 산 윤 의병장의 고귀한 삶을 기리고자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 앞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이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윤 의병장의 나라 사랑 정신을 알리기 위하여 공지천 의암공원으로 옮겨졌다.
 시집와서 30여 년 살던 춘천시 남면 발산리에 있는 윤 의병장 옛 집터에는 해주 윤씨 의적비, 춘천시 남면 가정리의 묘소에는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사적비 등이 있다.
 윤희순 의병장이 지은 의병가는 <애달픈 노래>, <안사람 의병가 노래>, <왜놈대장 보거라>, <의병군가 1·2>, <병정가>, <방어장> 등으로 춘천에서 일어난 의병과 여성 의병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녀가 지은 의병가사는 한글로 된 가사이면서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 지은 가사로서 문학사적 의의와 함께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경고를 담고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녀가 남긴 의병가 중 2019년에 국가 등록문화재 제750호로 지정된 <안사람 의병가>와 <병정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안사람 의병가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병정의 노래

 

우리나라 의병들은 애국으로 뭉쳤으니 고혼이 된들 무엇이 서러우랴.
의리로 죽는 것은 대장부의 도리거늘 죽음으로 뭉쳤으니 죽음으로 충신되자.
우리나라 좀 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가 좋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하지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
우리 의병들은 죽어서라도 너희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리 알고 우리 임금을 괴롭히지 마라. 원수 오랑캐야.

 

의암공원에 있는 윤희순 의병장(국가보훈부)

*이글은 11월 11일 한국교육신문에 연재된 글입니다.

한국교육신문

 

[라이프&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는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가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소양강 처녀’ ‘춘천 가는 기차’ ‘겨울연가’ 등 대중가요와 드라마에 등장해 많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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