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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윤의사 2018. 11. 4. 11:40

고려 후기의 정치가

 

고려가 망해갈 무렵,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해 질서를 바로잡는 한편, 밖으로는 외교에 힘써 나라간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건국 세력에 맞서 고려를 지키려다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포은집>이 있고, ‘단심가를 비롯한 많은 한시를 남겼다. 정몽주의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공이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릴 정도였다. 공민왕 때 장원급제를 하며 벼슬길에 오른 뒤, 정치 개혁으로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 도 직접 싸움터에 나가 외침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외교에 힘써 아예 싸움을 막고 다른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게도 하였다. 어려운 시기에 많은 일들을 맡았지만, 정몽주는 마음이 넓고 시원스러운데다 일처리가 공평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교 이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다

정몽주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였다. 나아가 정몽주는 부패에 빠진 불교가 고려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유교 이념을 통해 새롭게 사회를 바꾸려 했다.

무엇보다 정몽주는 <주자가례>에 따른 유교식 예절을 실천하게 하여, 유교가 지식을 넘어서서 점차 사회의 풍속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정몽주 자신이 대단한 충신과 효자로서 평생을 두고 유교 사상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정치 개혁과 외교에 힘쓰다

정몽주는 개성의 5부 학당과 지방의 향교를 통해 교육에 힘을 쏟고, 법률책을 펴내 어지러워진 고려의 법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곪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무료로 제공하는 의창을 세웠다.

한편 정몽주는 이성계를 도와 여진족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면서도 뛰어난 외교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이웃 나라끼리 평화롭게 지내자고 설득하고, 왜구에게 붙들려 간 수백 명의 백성을 데려오기도 했다.

 

고려를 위해 끝까지 충성을 다하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노력을 다했지만, 고려를 뒤집으려는 세력은 나날이 커져 갔다. 이들은 정몽주를 끌어들이려고 끈질기게 꾀했지만, “신하된 도리로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라며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단심가는 이러한 그의 애끓는 충정을 노래한 시조였다. 결국 정몽주는 뒤에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Tip) 선죽교

정몽주는 1392년 4월 4일 여느 때처럼 선지교를 지나 궁궐로 가고 있었다. 이대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숨겨놓은 자객이 느닷없이 나타나 쇠도리개를 휘둘렀다.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정몽주는 쇠도리깨를 피할 수 있었지만, 뒤이어 날아온 다른 자객들의 칼에 맞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결국 정몽주는 선지교를 피로 물들이며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뒤에 그의 피가 고여있던 다리의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는데, 마치 정몽주의 충절을 나타내는 듯 하였다. 그리고 대나무가 자라났다 하여 선지교는 선죽교라 불리게 되었다.

 

 

 

정몽주 신도비

 

 

영모


 

영모제 현판

 

 

단심가비

 

 

백로가비

 

 

 

 

정몽주 묘비

 

 

정몽주 묘 전경

 

 

 

 

   익살스러운 무인상

 

 

개성의 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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