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향토문화유적 제5호로 지정된 남구만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 1-5에 있다. 우리는 남구만 하면 ‘동창이 밝았으냐/ 노고지리 우짖는다...’의 시조가 떠오를 것이다.
남구만의 묘소는 1711년 신묘(辛卯) 3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본래 양주의 불암산 화접동 충경공묘 옆에 국장으로 처음 모셔졌다가, 집안에서 남구만을 불암산에 모시는 것을 반대하는 송사(訟事)와 관련되어 10년 만에 모현면 초부리 하부곡마을로 이장(移葬)한 것이다. 현 자리는 당대의 큰 스님인 일우스님이 명당으로 추천한 곳으로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동래 정씨가 세상을 떠나자 먼저 이곳에 모셨으며, 자신도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합장묘의 경우 부인을 왼쪽에 모시는데, 이곳은 오른쪽에 모셔 특이한 경우였다.
처음에 봉분을 낮은 호석을 두른 원형이었으며,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후손들이 묘역을 넓히면서 방형(方形)의 지대석(地臺石) 기단을 둘러 봉토했다. 묘소 앞에는 본래의 석물인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배열되었다. 장명등, 상석, 혼유석 등은 새로 설치한 것이다. 본래 청렴한 분이라 석물을 간소하게 하려는 남구만의 뜻을 자손들이 따랐던 듯 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선생의 묘를 생각나게 한다. 이황 선생의 묘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라고 쓴 비석과 그 옆에 퇴계선생이 스스로 쓴 명문만 있다. 이황 선생 묘보다는 낫지만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이었기에 그의 청렴함을 보여준다 하겠다. 묘비에는 ‘朝鮮領議政致仕文忠 南公諱九萬之墓. 貞敬夫人 東萊鄭氏祔右’라 쓰여 있다. 아마도 남구만의 청렴함을 상징이라도 하듯 부정한 관리를 혼내기 위해 팔작지붕형의 옥개석 상단 용마루 좌우에 해태를 조각한 묘표가 보인다.
남구만의 묘소를 찾기는 힘들다. 45번 국도를 타고 하부곡에 이르면 남구만묘소라는 작은 간판을 찾지 못하면 주변을 몇 번이고 헤매야만 한다. 초부리 마을에서 500미터쯤 가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991년에 세워져 있다.
남구만은 효종, 현종, 숙종의 3대에 걸쳐 활약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또는 미재이며,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을 세운 남재의 후손이다. 송준길에게서 공부하여 효종 2년(165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71년부터 4년 동안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적극적인 북방 경영 정책을 펼치고, 유학을 진흥시켰다. 2010년 11월 부터 2011년 2월 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을 일으킨 땅, 함흥’ 특별전을 갖는다. 이곳에 남구만 코너가 있다.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를 비롯한 선조의 왕릉을 비롯하여, 함흥본궁, 독서당, 격구정 등 태조의 발자취가 어려 있는 함흥의 사적들은 조선의 풍패지향(제왕의 고향)이었다. 그는 함흥과 북관의 이름난 경치 각각 10군데를 선정하여 그림을 그리고, 해설을 쓴 <함흥십경도기>와 <북관십경도기>를 남겼다. 그러므로 남구만은 함흥과는 뗄 수 없는 사람이므로 전시회의 한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
숙종 때 많은 정치적 변화에 부침을 거듭하였다. 삼정승을 역임하기도 하는가 하면 남해와 강릉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세종대왕이 여진족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4군을 재설치하자고도 하여, 무창과 자성에 2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시호는 문충이며, 저서로 <약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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