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역사인물백과

의자왕

윤의사 2010. 2. 21. 17:30

2010년 2월 20일 유석재기자의 ‘신역사속의 WHY'에서 의자왕에 대한 의견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역사라고 한다. 승자에 의해 왜곡되어진 의자왕에 대해 바른 해석이 필요한 시기이다.

 

최근 '증자(曾子)의 돼지'란 말이 화제가 됐다. 중국 춘추시대 말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증자가 자식과의 약속을 지키려 진짜 돼지를 잡았다는 고사다. 소문난 효자였던 증자에겐 에피소드가 많다.증자가 아버지 증석(曾晳)을 도와 오이밭에서 김을 매다 실수로 뿌리를 잘랐다. 화가 치민 증석은 아들을 방망이로 때려 기절시켰다. 한참 뒤에 깨어난 증자는 집으로 따라가 거문고를 탔다.자기가 무사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를 들은 공자는 "얼른 도망가지 않고 뭘 했느냐"며 혀를 찼다. 월(越)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때 증자는 이런 말을 남기고 피신하기도 했다."사람들이 내 집에 들어와 풀이나 나무를 망가뜨리면 안 돼!" 사회지도층 인사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에도 '증자'라는 별명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이다. 그 역시 오늘날의 시각에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의자왕이 '해동증자'로 불렸던 것은 태자 시절부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사치와 방탕 음주가무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던 것일까?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의자왕을 '개혁군주'로서 재평가하고 있다.그 아들 부여융의 묘지(墓誌)에는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 기록을 보면 재위 초기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즉위 다음 해인 642년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명해 신라 서부 최대의 요새였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했다. 신라로서는 망국의 위기를 느낄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던 645년에는 신라 군사가 징발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부 7개 성을 빼앗았고 655년에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 북쪽 경계의 30여개 성을 점령했다.좌평 성충(成忠) 등을 투옥한 일도 '귀족세력 억제와 왕권강화'라는 왕쪽의 입장에서 보면 달라진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이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시 개혁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볼 수 있다. '사치' 문제도 승자인 신라와 당의 악의적이고 과장된 기록이 많이 삽입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자왕이 궁남지에서 향락을 일삼은 것을 문제삼는다면?신라의 통일군주 문무왕이 안압지에서 주연을 벌인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내가 하면 풍류고 남이 하면 방탕인가? 삼천궁녀 얘기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에 처음 등장한다.이 역시 중국 시(詩)의 문학적인 수사법을 동원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결국 의자왕은 망국의 군주로 전락했던 것일까. 우선 무리하게 단행한 개혁의 후폭풍을 들 수 있다.귀족을 숙청한 자리에 왕비 은고(恩古)를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이 등장해 권력을 휘둘렀다. 이 와중에 고위급 스파이마저 생겨났다. 백제의 내정을 신라의 김유신에게 상세히 보고했던 좌평 임자(任子)였다.여기에 왕 자신의 지나친 자만심이 결정적인 파국을 낳았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인 노선이 나당(羅唐) 연합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지만, 의자왕은 줄곧 "신라와 당나라의 동시 공격은 불가능하다"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그 때문에 660년 두 나라의 협공 앞에서 전략을 세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7월 13일 사비성(부여)이 함락되고 왕이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을 때만 해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그 후로 3년 넘게 백제 전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지방군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어이없게도 피란 닷새 만에 갑자기 항복해 버렸다.왜? '당이 철군하는 대신 왕이 항복하고 백제에 친당정권을 세운다'는 밀약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마지막 오판이었다. 신라의 반발로 밀약은 없던 일이 됐고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된 지 며칠 만에 죽었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들이 있는 곳, 바로 북망산(北邙山)이었다. 얄궂게도 그의 무덤은 '삼국지' 끝부분에 등장하는 오(吳)나라 최후의 임금 손호(孫晧)의 옆자리였다고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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