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창덕궁

창덕궁 돈화문과 진선문

윤의사 2016. 9. 27. 20:40

창덕궁은 태종이 창건한 조선의 제 2궁이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이 불타자,

경복궁 자리가 불길하다고 하여 광해군이 창덕궁을 정비하고

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때 불타버린 것을 20여 년 후에 다시 복원하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270여년간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

다른 궁궐의 문이 삼문(三門)인 것에 비하여,

돈화문은 오문(五門)이다.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임금이 되었지만,

정도전의 요동 정벌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바로 명나라의 황제가 사는 궁궐인 자금성에서나 볼 수 있는

오문을 만든 것은 자주 국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은

정도전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삼문만 사용하였다.

문 앞에 월대를 쌓고 2층으로 된 문을 궁궐보다 높게 만들어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순종이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월대를 철거했다가

돈화문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다시 낮지만 월대를 복원하였다.

가운데 문 앞에는 어도로 이용하기 위해 난간이 놓여져 있다.

2층으로 우진각 형태이지만 실제로 중간에 마루가 있는 2층집이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2층 마루에는 종이 달려 있어 12지간의 시각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거나

위급시에 종을 치기도 하였다.

2층의 바깥쪽에는 삼태극(參太極) 무늬가 있는데, 삼파문(參巴紋)이라고도 한다.

이 무늬는 천(天), 지(地), 인(人)을 상징한다.

실제로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장 이홍립은 반란군과 내통하고 종을 울리지 않아

결국 광해군이 쫓겨나고 조카인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만큼 나라의 방어에는 한 치의 빈틈도, 또한 분열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돈화문 전경, 오문이지만 삼문만 개방되어 있어 아쉬움이 크다.

 


백성의 공간과 임금의 공간을 구분하는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進善門)에 이른다.

진선문은 창건 당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1908년 인정전 개수 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에 복원되었다.

‘선한 말을 올린다.’는 뜻을 가진 진선문을 통과하면,

바로 임금의 정전인 인정전이다.

임금에게 ‘바른 말로 진언하고, 바른 생각으로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선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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