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성남의 인물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

윤의사 2019. 9. 8. 17:51

분당에 중앙공원에는 한산이씨의 묘역이 있다.

이색의 4대손인 봉화현감 한원군 이장윤(토정 이지함의 조부)부터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분당과 관련있는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성리학자이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함께 3은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하자 벼슬을 버리고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시를 지으면서 지냈다. 고려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6천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문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이색은 열네 살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 건너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려로 돌아온 뒤,

공민왕에게 토지 제도의 개혁, 국방 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제안하였다.

또한 홍건적이 침입해 오자 공민왕을 모시고 상주로 안전하게 피난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 뒤 이색은 중국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때에,

쇠퇴하는 원나라보다는 명나라와 가가워져야 우리나라에 많은 이익이 있다며

더욱 강력한 친명 정책을 주장하였다.

 

불교 개혁을 주장하다

이색은 불교의 우수성을 성리학과 결합시키면 고려가 더욱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불교계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면서 고치는데 앞장섰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많은 승려의 수를 줄이고,

당시 사찰이 누리고 있던 여러 가지 특혜를 제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색의 불교 개혁 주장은 고려 사회가 점차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성리학을 널리 퍼뜨리다

공민왕 때 국립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이 세워졌다.

이색은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만들고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같은 학자들을 교수로 뽑아

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공을 세웠다.

또한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여러 차례 맡아

권근, 맹사성 같은 유명한 관리와 학자 100여 명을 길러 내 교육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훗날 조선에서 성리학이 정치의 근본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자,

이색은 조민수와 손을 잡고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게 밀려 귀양을 갔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이색에게 벼슬을 주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벼슬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396년 여강으로 다시 귀양을 가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Tip)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왜 삼년상을 입으라고 할까?

공자는 자식이 나서 3년은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으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년상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년상은 3년 동안 영실에 신주를 모신 채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내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듯이 했다고 한다.

밖에 나가 다닐 때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돌아가시게 했으니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그동안 술과 고기도 전혀 먹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는 부모의 경우에 100일 만에 상을 벗었으나,

1366년에 이색의 건의로 일반 백성들까지 삼년상을 치르게 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다가,

1517년에 조광조의 유교 개혁 정치의 한 방법으로 양반, 상민 모두 삼년상을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져

삼년상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속이 되었다.


이색의 초상화


이색의 묘


이색의 신도비


분당 중앙공원에 있는 이색 후손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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