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5년(1627)에 남이흥 장군은 3도 부원수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였다. 이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청국)의 3만6천 대군이 침공하였다. 남이흥 장군은 안주성에서 3천여명의 군사로 맞섰지만,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만주족을 화약고로 끌어들여 화약을 점화하여 많은 적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인 남유 장군은 노량해전이 있은 뒤 3일 후 왜군에 의해 희생되었고, 남이흥 장군이 평안도에서 죽음을 당하자 모친은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하여 죽었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 마는 전몰 군사와 그 미망인과 자식들이 잿더미속에서 울게 됨이 한스럽다.” 고 했다. 인조는 남이흥 장군의 전사에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입고계신 곤룡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