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선조, 목릉

윤의사 2012. 11. 25. 16:36

 

목릉은 구리시 동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선조와 그의 비인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함께 모셔진 동원이강릉이다.

 

이 능역에는 의인왕후 박씨가 처음 모셔졌다.

경릉 자리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경릉에 모시려 하다가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고 하여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선조는 명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의 명을 받아 1567년 7월 3일에 임금이 되었다.

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이며, 어머니는 군부인 정씨이다.

 

선조는 조선시대 최초로 직계가 아닌 방계에서 임금이 된 첫 번째 임금이다.

선조는 자신이 방계라는 사실에 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노심초사하였다.

그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묘를 덕릉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것은 원상대로 되돌려야만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우는 등 분노하였다.

선조가 허둥지둥하는 것에 비하여 광해군은 흔들리지 않고 외적을 막고 백성들을 살폈다.

이에 의인왕후는 선조의 뒤를 이을 세자로 광해군을 점찍었다.

 

 

그러나 의인왕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2년 만인 15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으로서는 시련의 날이 오게 되었다.

바로 인목왕후 김씨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생산하였다.

 

왕위계승은 적자우선이다.

신하들은 설왕설래하였다.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세자 이양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세자이행작업을 마치기 전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왕권은 광해군이 잡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방에 갇힌 채 죽음을 당했다.

인목왕후도 경희궁에 유폐된 채 15년을 보내야만 했다.

 

 

선조의 릉을 목릉이라고 하는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고,

이황이나 이이와 같은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왕 목릉성세라고 불려지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봉분이 세 개로 나누어 지다보니 정자각의 위치도 불완전하고,

신도의 위치도 구불구불하다.

정자각은 주심포 양식인 다른 릉과 달리 유일한 다포양식이다.

목릉은 문, 무인석의 규모가 크지만 조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병풍석의 문양은 아름다운 편이다.

 

 

목릉 옆,, 가운데 능침인 원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의 능이다.

원래 유릉으로 불리다가 목릉으로 합쳐진 것이다.

왕비의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능침의 규모도 왕릉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다.

전쟁이 막 끝난 후라 왕비릉이라고 여기기 힘들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는 석물이다.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왕비였기에 후궁들이나 후궁의 소생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보살피기도 하였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후궁 인빈 김씨와 피란을 가자,

혼자 피란길에 나서야만 할 정도로 선조의 차별을 많이 받았다.

 

 

선조와 32살 차이로 혼인한 인목왕후 김씨(1584~1632)는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고 내정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1632년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나자 혜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목릉으로 합쳐지면서 정자각에서 신도의 연결이 구불구불한 부조화스러운 릉이 되어버렸다.

 

 

 

목릉의 정자각, 조선왕릉의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식이다. 

 

 

목릉의 신도비 

 

 

선조 이균의 릉 

 

 

의인왕후 박씨의 릉, 왕비릉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인목왕후 김씨의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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