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수릉

윤의사 2016. 9. 25. 20:34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는 사극, '구르미 드는 달빛' 의 주인공인 효명세자

(후에 익종으로, 다시 고종 때 문조황제로 추존됨).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1809년 태어났다.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순조는 정치를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하에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조는 38세 되던 1827년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대리청정을 위임받은 세자는 개혁 정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많은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부정으로 얼룩져 안동김씨의 등용문이었던 과거가 김노, 홍기섭, 김노경, 이인부, 김정희와 같은

전국의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나아가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변사 당상들을 감봉 조치하여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초산 출신의 탐관오리 서만수를 징치하고 우의정 심상규를 축출했으며 부왕 순조를 기만한 조봉진을 유배형에 처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궁중 연회를 자주 하였다.

연회의 목적은 바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명목은 부왕 순조나 순원왕후를 위로하고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안동김씨는 세자가 순원왕후의 아들이기에 반대하지 못했고,

세자는 자신의 처가인 풍양조씨 세력을 끌어들여 힘을 키웠다.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을 지어 공연장을 만들고,

궁중 무용인 정재를 정비하였다.

이대 나온 것이 바로 '춘앵무'이다.(http://blog.daum.net/hannal/16518958 참조)

그리고 정조 때 개혁정치의  중심이었던 규장각처럼

창덕궁 후원에 기오헌과 의두합을 지어 미래 정치를 그렸다.

그러나 대리청정 3년 만에 흉년이 일어나 안동김시가 세자의 잘못을 논하기 시작하면서

세자는 견제당하였다.

나아가 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위독하였다.

갖은 약재를 준비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남양주에 머물고 있던 정약용까지 불렀으나, 정약용은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5월 6일 새벽 희정당 서협실에서 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22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조선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효명세자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효명세자의 죽음을 두고 소현제자나 정조 등의 독살설이 나오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살펴볼 자료는 없다.

효명세자는 구리에 있는 동구릉 중 수릉에 모셔져 있다.

수릉에는 신정왕후 조씨와 합장되어 있다.

 

 

 

신성 지역을 표시하는 홍살문

 

 

수릉 신도비

 

 

수릉 전경(능침 공간을 오를 수 없어 멀리서 보아 아쉬움이 크다)

 

 

정자각

 

 

후대의 임금들이 절하는 판위

 

 

지방을 소지하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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