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지만 여전히 날씨는 영하를 밑돌고 있다.
그래도 봄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는지 수원 화성행궁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13년(1789)에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팔달산 동쪽 기슭에 만든 것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존)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으로 만든 후
13차례 방문한 정조가 1794년부터 96년(정조 18년~20년)에 화성을 건설하면서 화성행궁을 완성하였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한양의 궁궐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국내의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낙남헌을 제외한 건물이 사라졌다가 1996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20월 85%에 해당하는 482칸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남향이면서 T자 모양으로 도로를 배치한 것에 비하여 수원 행궁은 동향이면서 도로는 +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서울과 지방의 원활한 물자 유통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정조의 신도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미로한정에서 바라본 화성행궁의 모습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정조 14년(1790)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정문은 어도요, 우측은 문관이, 좌측은 무관의 출입로이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면서 수원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면서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화령전(華寧殿)은 사적 제115호로 순조 원년(1801)에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影殿)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화령전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정조 18년(1794)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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