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화성

수원 화성이 준공된 날 9월 10일

윤의사 2010. 9. 10. 07:18

오늘은 세계 최초의 신도시인 화성이 준공된 지 214년이 되는 날이다. 화성은 서양에서 신도시가 건설된 1910년대보다 무려 120년이나 앞선 대단한 도시 발달의 기원이었다.

 이 곳을 신도시로 건설한 사람은 정조(재위:1777~1800)임금이다. 정조가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한 목적은 정치, 군사적인 이유였다.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당파 싸움때문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며,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반대파인 벽파를 누르고 왕의 권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수원에 행궁(行宮: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르는 별궁)을 건설하고 성을 쌓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수원은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이 있었던 곳으로 군사력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목적 이외에도 정조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고 동아시아에 새롭게 떠오르는 조선의 모습을 나타내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시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한 것으로 보아 정조 임금의 정치 사상 밑바탕에는 작은 중국이랄는 생각이 깔려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성 신도시는 정조 18년(1794)부터 정조 20년(1796) 10월까지 2년이 걸렸다. 동원된 사람이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미장이 295명 등의 기술자 1만 1800명이 일했다. 또 돌덩이만 18만 7600개, 벽돌 69만 5000개와 쌀 6200석, 콩 4550석, 잡곡 1050석이 사용되었고, 목재 2만 6200주, 철물 55만 9000근, 철엽(鐵葉) 2900근과 숯 6만 9000석, 기와 53만 장, 석회 8만 6000석이 사용되었다.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공사비가 87만 3520냥, 양곡 1500석이 든 큰 공사였다.

 도시는 수도 서울을 그대로 모방하여 4대문을 두고(남-팔달문, 북-장안문, 동-창룡문, 서-화서문), 팔달산 아래 행궁(行宮), 관청(官廳),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등 건물들과 5.9킬로미터에 달하는 성곽(城郭)으로 나누어 있다. 특히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성을 쌓았던 방법에다 북학파의 과학 기술 지식이 합쳐진 발달된 성 쌓는 기술의 집합체이었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지휘 아래 정약용(丁若鏞)이 건설한 이 성곽은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올리는 거중기(擧重機)와 운반 기계가 사용되었고, 규격화한 벽돌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수원성의 건설은 개혁을 꿈꾸는 실학자들이 원대한 꿈을 이루는 기회가 될 만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조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실학자들의 도움으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정조의 죽음은 북학파의 꿈도 끝을 알리는 아쉬움을 남게 했다.

 또한 군사적 목적의 신도시로는 숙종(재위:1674~1720) 때 건설했던 북한산성도 있었다.

북한산성은 인조(仁祖)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태종에게 당한 아픔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즉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왕이 임시로 머물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궁과 식량 창고, 무기고, 장수의 지휘본부인 장대가 세 곳, 성을 관리하는 관청 세 곳, 승병을 위한 사찰 열세 곳, 병사 숙소 일백 사십 삼 곳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산성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군사 방어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태조 때에도 계룡산에다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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