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판사스님 효봉선사

윤의사 2020. 3. 10. 17:03

효봉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판사로 일했다.

판사 노릇 10년재 되던 해에 효봉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때마침 일제는 사상범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때였다.

효봉은 생애 처음으로 남을 죽여야만 하는 사건을 접수하였다.

그것도 독립운동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온 독립투사를 죽여야만 했다.

사건 자료와 증거로 미루어 볼 때 일제의 법에 의하면

어쩔 수 없이 시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사형을 선고하고 난 효봉은 큰 회의에 빠져

무작정 판사직을 내던지고 가출을 했다.

민족적 인간적 양심이 그를 몰아낸 것이었다.

그로부터 장마철이면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농짝을 져다주기도 하는 등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방랑했으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고행이었다.

그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물론 효봉의 결심은 평생 동안 참회의 길을 걸으리라는 것이었지만,

더욱 깊은 참회를 위해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

나이 서른 여덟로 석두(石頭)를 은사로 득도한

그는 늦게 출가한 만큼 남보다 배로 정진하였다.

입산한 지 여섯 해가 되던 해에 그는 일생 최대의 용단을 내렸다.

늦은 출가에다가 나이만 불어나게 되자

효봉도 큰 결심을 해야만 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효봉은 금강산 법기암 뒷산에 토굴을 지었다.

배설할 수 있는 통로와 음식물을 받을 수 있는 작은 구멍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밖에서 모두 봉하게 했다.

서른 여덟 늦깎이인 효봉은 결사적인 각오로 토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 때 효봉이 참구했던 것은 무() 공안이었다.

암자에서 밥을 나르는 스님은 하루에 한 번씩 구멍 앞에다가

밥을 갖다놓곤 했다.

그로부터 16개월 만인 1931년 여름의 비 개인 어느 날 아침이었다.

드디어 토굴벽이 무너졌다.

일년 반만에 걷는 걸음은 어린애처럼 비틀거렸다.

오도송이 읊어졌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이재운 선생의 <목불을 태워 사리를 얻어볼까>에서

 

밀양 표충사에는 효봉선사의 부도탑과 보탑비가 있다.


왼쪽이 부도탑, 오른족이 보탑비이다. 보기드문 부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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